투르게네프, <첫사랑>

-먼 그대

by 지얼


'한때는 당신을 미워했지요. 남겨진 상처가 너무 아파서….' 90년대, 라이브 카페를 휩쓸었던 김종찬의 <당신도 울고 있네요>라는 노래의 가사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곡이지만, 다음의 가사에는 '그래서 다행이다'하는 마음이 엿보이는 것 같아 공감이 간다.


당신도 울고 있네요

잊은 줄 알았었는데


대개 한쪽으로 기울고야 마는 사랑의 시소에서 관계의 무게감을 감당하지 못해 자의든 타의든 시소의 한쪽 자리에서 이탈한 마당에, 남겨진 상처를 혼자만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왠지 억울하다. ‘나 홀로 방황했’던 것만이 아니라, 잊은 줄 알았었는데 ‘당신도 울고 있’다면 얼마나 위안이 될까.

사랑했던 여친과 헤어지면서 '좋은 남자 만나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남자들을 보면 속악한 나로서는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너,

좋은 사람 콤플렉스 있지?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신도 울고 있’기를 바라는 건 버려진 자의 정신적 자위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워둔 시소의 자리는 영원히 빈자리로 남지도 않을 뿐더러, 그녀(그)가 보기에 나보다 나은 그 누군가가 제법 시소의 균형을 유지하게 되면 대개는 자신이 시소에 묻혔던 손때마저 세월이라는 삭풍에 쓸려 지워져 버림을.

그래서 작가들은 죽음의 형식으로 사랑을 박제시켜 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중딩 시절, 교회에서 주최한 3박 4일의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소설 <첫사랑>을 선물로 받았다. 버스 안에서 절반 가량 읽고 던져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월이 흘러 20대 중반에 <다모아> 출판사의 문고본으로 재독했다. 중편 정도 분량의 그 작품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첫사랑의 대상이 하필이면......


제기랄,

이게 뭐야...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대입시험을 앞둔 16세의 청소년이다. 아버지보다 10살이나 많은 탓에 불안감이 만성이 된 어머니와, (주인공의 표현에 의하면)‘현명해 보이는 처세와 반듯하고 깔끔'하지만 전제적인 아버지와 함께 모스크바의 한 별장에서 머물고 있다. 어느 날인가 블라디미르는 별채에 세든 한 공작부인의 딸 지나이다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런데 지나이다는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어장관리녀'이자 남자의 인생을 고장내는 팜므파탈(femme fatale)이다. 구태여 애인으로 삼을 것도 아니면서 오로지 자신에게 향해 있는 남자들의 눈에 불똥이 튀는 걸 바라보는 것을 즐기기까지 한다. 의사, 귀족, 시인, 경기병, 대위 등 다방면에의 남자 수집벽이 있다고나 할까. 그녀는 자신을 숭배(?)하는 남자들과 작은 모임을 가지며 온갖 유희를 가진다. 흡사 여왕벌과 꿀벌들의 관계 같다.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우리들 역시 인생에 한두 번 정도는 여왕벌을 모시고 산 적이 있지 아니했었나. 대만 영화 <그 시절, 우리들이 좋아했던 소녀>라는 영화가 괜히 나온 건 아니다.


그리고 성별은 다르지만 이런 놈도 있다.


그런 그녀가 병이 났다. 좀 과장하자면 상사병이 든 거다. 주인공 블라디미르는 병의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절망한다. 더불어 유재하의 노랫말처럼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는 사실―게다가 미소보다 더 진한, 자신에게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 그녀의 입맞춤이 한낱 가벼운 동정심에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지나이다는 블라디미르의 머리칼을 심술궂게 잡아 뽑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아프겠죠! 그럼, 난 아프지 않은가요? 난 아프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네'가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프다. 위의 관계에서는 '너'의 아픔과는 상관없이 '나'는 (디른 일로) 아프다. 이렇게 지나이다는 영혼 없는 말을 흘리며 자신의 심술이 좀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사과와 함께 이렇게 홀린다.


“난 당신의 머리카락을 내 로켓(장신구의 일종)에 넣고 다니며 언제까지나 간직하겠어요.”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의 한 장면


한 번은 4m 남짓의 높은 담 위에 서 있던 블라디미르에게, 자신을 사랑한다면 뛰어내려보라고 요구하여 그를 시험에 들게 한다. 찐따 블라디미르는 하란다고 진짜 한다. 길바닥에 나자빠진 블라디미르에게 지나이다는 병 주고 약 준다.


“어쩌려고 그랬어요?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곧이듣다니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그리고는 그의 얼굴과 입술에 키스를 퍼붓는다. 물고기를 위한 사료 배식이다.

이런 적도 있다. 본문을 직접 인용해 본다.


그녀는 이렇게 얘기한 적도 있다. “당신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나 본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난 나를 꼼짝 못 하게 구속해 줄 수 있는 남자를 원하지, 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진 않아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 만나지질 않으니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난 누구의 손에도 잡혀있지 않을 거예요. 알겠죠?”

“그렇다면 당신은 평생 사랑할 수가 없겠군요?”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아니, 그럼, 당신은 어쩌죠?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걸 몰라요?” 이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장갑 낀 손끝으로 장난치듯 내 코를 두드렸다. 정말이지 지나이다는 나를 마음대로 희롱했다.


“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진 않아요.” 여기엔 밑줄을 쫙 쳐야 한다. 짝사랑의 비극, 아니 작가 마크 맨슨의 표현대로 '절박한 남자'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사랑의 시소가 평행을 이루지 못하고 한쪽으로 심하게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 절박해 보이는 자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스탕달의 저서 <연애론>은 실패가 낳은 역작이다. 불에 데어 본 자만이 화상을 피하는 법을 안다. 그러니 나는 종종 짝사랑을 하거나 썸을 타는 후배들에게 ‘필패(必敗)의 법칙’에 대해 이렇게 조언할 수밖에.

쌍방의 관계에서 자신의 과도한 애정을 노출하는 것은, 이를 테면 둘이 치는 포커게임에서 서너 장의 패를 상대에게 미리 보여주고 치는 것과 같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이렇게 썼다.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상대를 향한 강렬한 욕망은 유혹에 필수적인 무관심에 방해가 된다. 또 상대에게 느끼는 매력은 나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동반하기 마련이니,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완벽함에 자기 자신을 견주어 보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싶은가? 그러면 덜 사랑해라.



욕망은 쉽게 충족되지 않는 것을 향한다. 그럼에도 사랑의 찐따들은 대개 자기 자신을 이미 충족되어 버린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그녀(그)가 이미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대상에 대해 똥줄을 태우겠는가? 그러니 그대는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하여금 '허망한 소유'가 되게 하지 말라. 욕망 그 자체가 되게 하라. 작가 앙드레 지드의 이 말이 너무 진중하게 들려 거북하다면 좀 자본주의적으로 속악하게 말하겠다. 자신을 바겐세일해서 고유한 교환가치를 훼손하지 말라.


아무리 해도 '욕망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건 사랑의 대상이 나무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니 그땐 애정전선의 진지(陣地)에서 가능한 한 빨리 철수할 일이다. 아니면 베르테르처럼... 그대의 욕망을 반사해 버리는 거울 같은 '먼 그대'로부터.

교류되지 않는 욕망이란 얼마나 자기 파괴적인가.


다시 <첫사랑> 얘기로 돌아가자.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이지 지나이다는 나를 마음대로 희롱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가지고 논다는 걸 몇 번이고 인지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지나이다는 여전히 고양이가 쥐를 데리고 놀듯이 나를 갖고 놀았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 또한 어쩔 것이랴. 사랑의 또 다른 비극성은 그 자체의 맹목적인 관성에 있는 것임을. 그 대상이 지독한 팜므파탈일지언정.

이 불쌍한 블라디미르를 어쩔 것인가. ‘누구의 손에도 잡혀있지 않을’ 거라는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이, 하필이면 자신이 그렇게도 경외하던 아버지였다니! 사랑하는 여자가 아버지의 상간녀로 전락해 버리다니! 블라디미르의 심정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내가 알게 된 이 사실은 도저히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 뜻밖의 사건이 여지없이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그동안 내 마음속에 자라던 꽃이 송두리째 뽑혀 주위에 산산이 흩어진 채 짓밟혀버렸다.


사랑의 맹목적 관성은 사랑에 빠진 지나이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난 모든 것이 싫어졌어! 차라리 이 세상 끝에라도 가버렸으면 좋겠어요. 이런 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중략)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정말 사랑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군요!”


(문득 엘비스 프레슬리의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 이 아님.


이렇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간혹 불을 향해 뛰어드는 나방이 된다. 현실에서는 가정을 등지고 사랑의 도피를 하거나(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실낙원>을 보라), 아주 간혹 내연관계를 둘러싼 자살 소동이나 치정극도 벌어진다. 기독교적 가치관/전통이 견고한 사회에서의 소설에서는 그 누구도 아닌 작가가 나방들을 불구덩이에 던져버린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자살로 죽이고, 투르게네프 역시 지나이다를 ‘분만 중 사망’으로 치워 버린다(블라디미르의 아버지 역시 42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다).

지나이다의 죽음 앞에서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탄식한다.


“죽다니!” 나는 입구의 문지기를 멍청히 바라보며 이렇게 되뇌었다. 그리고 힘없이 거리로 나온 나는 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지난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내 눈앞에 나타났다. 아아, 그 싱싱하고 타는 듯 빛나던 젊은 생명이 이렇게 끝나다니! 가슴을 두근거리며 안타깝게 달려간 곳이 결국 죽음이었단 말인가! 나는 그 그리운 얼굴이며 초롱초롱한 눈, 그 물결치던 머리카락이 좁디좁은 관 속에 넣어져 축축한 땅 밑 어둠 속에 묻혀있을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곳은 이렇게 살고 있는 나에게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인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이르기도 전에 이렇게 블라디미르는 젊음과 생의 순간성에 대한 각성을 얻으며 성장한다.


아아! 청춘이여! 청춘이여! 그대는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그대는 마치 이 우주의 온갖 보화를 혼자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대는 자신만만하고 대담무쌍해서 “보아라, 나는 이렇게 혼자서 살아간다!”라고 말하지만, 그대의 아름다운 시간은 흘러가버리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것은 마치 햇볕을 받은 백랍처럼, 그리고 흰 눈처럼 녹아 없어진다…….


어쩌랴. 회자정리, 생자필멸인 것을.

<첫사랑>의 백미는 아마도 사랑을 멈출 수 없는 블라디미르의 다음과 같은 고백 장면이 아닐까 한다. 사뭇 감동적이다.


“……나에 대해서는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 주세요. 가끔 당신을 괴롭히며 장난도 쳤지만, 나,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는 아니에요.”

그녀는 몸을 돌려 창가 쪽에 기대섰다.

“정말, 난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나쁜 여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어요.”

“내가?”

“그래요. 당신이, 당신이 말이에요.”

“내가요?” 나는 슬픈 목소리로 되풀이해 물었다. 내 가슴은 억누를 수 없는,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도취되어 야릇하게 떨려왔다. “내가? 아니, 그렇지 않아요. 믿어줘요. 당신이 설령 무슨 일을 했건, 그동안 당신의 짓궂은 장난에 수없이 마음 아팠어도, 지나이다, 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고 존경할 겁니다.


모든 인질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닐진대, 사랑에 빠진 이는 어찌하여 대개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그물에 걸려들고 마는 것일까?

친구들 중에 블라디미르 같은 이가 있다면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쳐서라도 미망에서 일깨워주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자신이 두는 장기(將棋)가 아니기 때문임을 우리는 안다. 누구든 훈수를 둘 때에는 악수(惡手)를 두지 않는 법이잖은가. 사랑은 능동태가 아니라 철저하게 수동태임을ㅡ우리가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이승우 작가는 <사랑의 생애>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이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이 들어와 사는 것이다.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체가 숙주를 선택하는 이치이다.





<문화산책>에 패널로 출연한 한 문학평론가가 말한다. 우리가 첫사랑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것은 실상 과거의 사랑의 대상을 잊지 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더없이 순수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을 참 길게도 했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대일까 그때일까?


스피노자는 사랑의 관념을 만드는 것은 기억이라고 말한다. 기쁜 경험을 기억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억을 그런 기쁜 경험을 다시 가져다줄 수 있는 대상과 연결시킨다. 그때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은 추억이다.

-발타자르 토마스, <비참할 땐 스피노자>중에서


그리움의 정서란 어쩌면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첫사랑이라는 유일한 대상으로 집약되어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한 과거지사뿐만 아니라 진실로 감각할 수 있는 능력, 깨어있음, 능동적으로 살아있다는 느낌 등이 축약된.

순수하다는 것은 앞뒤 잴 것 없이 오로지 사랑이라는 맹목의 춤을 추는 것. 판단보다 감응하는 것. 이성의 포도(鋪道)를 걷기보다는 정서(affect)의 가시밭길을 능히 감내하는 것.


너를 추억하는 것은 멀고도 험한 길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


류이치 사카모토, 영화 <팜므파탈> 중에서 <Lost th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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