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와 토루 타케미츠

-자서전에서

by 지얼
2377783C54796AFE2E Toru Takemitsu(1930-1996)


젊은 시절에 유치하게도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성형 수술을 해서 킹카로 거듭난다. 오징어 시절, 나의 구애에 퇴짜를 놓았던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완전히 다른 사람의 얼굴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녀를 유혹한다.

애정 전선에서의 패퇴가 단지 얼굴 때문이라고 착각한 시절의 생각이다.


어쨌거나 그녀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문제가 있을까?

‘고작 얼굴 같은 비본질적인 외피에 홀려 홀랑 넘어가다니…. 이런 여자를 사랑했다는 말인가?’하는 회한이 남을지도 모르겠지만, 내면이 아닌 외피에 홀려 사랑에 빠진 건 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니 그런 회한 따위는 패스.

결국 아무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애초에 나를 걷어찬 그녀라면 몰라도, 유혹의 대상이 와이프라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완전히 다른 얼굴의 킹카가 되어 자기 와이프를 유혹하여 성공했을 경우, 간택과 배신에 대한 모순적인 양가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이 ‘일본의 카프카’로 불리는 아베 코보의 상상력이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주인공인 ‘나’는 실험실에서 발생한 폭발로 인해 화상을 입고 얼굴을 잃는다. 이후 타자와의 관계는 물론 와이프와의 관계도 소원해지자 '나'는 어느 과학자의 힘을 빌려 '타인의 얼굴'을 한, 인간의 피부와 똑같은 가면을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와이프를 유혹하는데...


<타인의 얼굴(Tanin no Gao)>은 1966년에 테시가하라 히로시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영화 음악은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현대음악가 토루 타케미츠가 담당했고 아래의 <왈츠>는 주제 음악이다. 거의 50년 전에 이런 수준의 영화음악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토루 타케미츠의 음악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이런 말랑말랑한(?) 전통적 방식의 조성음악으로 그를 한정할 수는 없다. 놀라운 것은 전통적 방식의 조성음악에서부터 현대음악까지 이 모든 것을 독학에 의해 구축했다는 점이다.



기타 악보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25년 전에 경기도 하남시 소재의 알마기타 공방에서 라우로와 토루 타케미츠의 기타 악보를 구해서 온 적이 있다.

당시 토루 타케미츠가 편곡한 비틀스의 <Here, there and everywhere>을 연주해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껏 경험한 기타 편곡 작품들 중 최고의 화성 감각을 지닌 작품’이라는.

이후 롤랑 디앙(Roland Dyens)이라는 불세출의 인물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한동안 ‘이렇게 편곡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자서전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각 분야의 문화와 교류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인맥이다. 고리처럼 유명 인사들이 다 얽혀있는 듯하다.

인생 편력이 참으로 다채로운데, 고딩이 때 빨간 헬멧을 쓰고 ‘투쟁’의 전선에 뛰어드는가 하면 다른 분야의 예술인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전공 강의를 듣는 것보다 미술 학도와 어울리기를 더 좋아했다고 하며 연극계 인사와도 줄이 닿아 있었단다.

그의 아버지가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던 사실과 60년대라는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인지 독서의 목록도 문학에서 철학까지 꽤 다양했나 보다. 문학의 경우 오에 겐자부로와 위에서 언급한 아베 코보의 작품도 섭렵했다는데, 하루는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 아베 코보가 방문하여 강연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때 해 준 얘기가 매우 재미있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라고.

토루 타케미츠와의 인연에 대해서 사카모토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직접 인용한다.


대학이 너무 따분해서 이윽고 연극계 친구들과 신주쿠의 골든가(신주쿠의 음식점 거리)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한참 오락가락하다 보니 어느새 과격파 퇴물이면서 음악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친해져 있었다. 그들과는 “자본주의에 의해 관리된 음악을 해방시키자!”라든가 “중국의 인민 해방군을 본떠 우리도 음악으로 노동자에게 봉사하자!”라든가, 그런 얘기를 하면서 술을 마셔댔다. 그런 흐름 속에서 “타케미츠 토루라는 작자, 우리 악기를 사용하면서 너무 우파적인 거 아냐?” “좋아, 철저히 비판해 주자!”라는 식으로 얘기가 되어서 등사본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타케미츠 씨의 연주회장에 살포하러 출동했다.


회장은 처음에는 우에노, 두 번째는 어딘가 야외였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두 번째 전단지를 뿌리는 우리 앞에 타케미츠 씨 본인이 나타났다. 나는 “당신은 일본음악을 작품으로 하는 분이 대체 그게 무슨 짓입니까?”라는 얘기를 떠들어 가며 불만을 터뜨렸다. 타케미츠 씨는 한참이나 우리의 얘기를 들어주면서 거의 30분을 선 채로 대화했다. 정말 인상적인 말씀을 해주셔서 나는 그만 홀딱 빠져 크게 감동하고 말았다.


타케미츠 씨는 그 몇 년 뒤에 다시 만나 뵐 기회가 있었다. 신주쿠의 어느 바였을 것이다. 타케미츠 씨 쪽에서 먼저 나를 발견하고 “그때 그 전단지 나눠주던 학생이잖아!”라고 말을 걸어 주었다. 게다가 내가 작곡한 현대음악 풍의 작품을 어디선가 들어보신 모양이었다. <분해, 경계, 모래>라는 복잡한 제목의 곡으로, 다카하시 아키 씨가 연주해 준 것인데, 아마 그 곡이었을 것이다. “자네가 작곡한 곡을 들어봤어. 자네는 정말 귀가 좋아.” 그렇게 칭찬해 주시는 말을 듣고 아주 흐뭇했다.



영화음악에 종사하는 사람치고 류이치 사카모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현대음악이나 클래식기타의 전문가라면 토루 타케미츠를 100% 알고 있을 것이다. 문학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이라면 아베 코보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어떤 식으로든 이토록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이 이런저런 관계로 얽히는 걸 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경계 없는 교류에 대해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 외에도 철학자 요시모토 다카아키(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와 오모리 쇼조, 그리고 소설가 무라카미 류와 함께 공동 집필한 전력도 있다.

아래는 영화감독인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 대해서 둘이 언급한 대목이다(영화에 종사하는 사람치고 오즈 야스지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으리라). 사카모토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리고 다시 10여 년 뒤, 이번에는 런던에서 만나 뵐 기회가 있었다. 내 친구인 데이비드 실비언(밴드 ‘Japan'의 리더)이 뭔가 인연이 있어서 타케미츠 씨와 잘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내가 런던에 있을 때, 어느 날 데이비드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내일 타케미츠 씨를 만날 건데 너도 함께 갈래?”라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물론 가겠다고 했고 셋이서 점심을 함께 했다.
그때는 이미 나도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이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의 데뷔작이기도 하다)>등의 영화 일을 하던 때라서 주로 영화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케미츠 씨도 나도 오즈 야스지로 감독을 좋아했지만 딱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고 의견이 일치했다. 오즈의 영화는 아주 훌륭하지만 음악이 끔찍하다,라고. 그래서 언젠가 우리 둘이서 오즈의 영화음악을 전부 다 바꿔 버리자고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데이비드까지 우리 셋이서 함께 음악을 만들자고 아주 신바람이 났었다.


며칠 전에 오즈 야스지로의 1960년 작 <가을 햇살(秋日和)>을 음악에 집중하면서 봤다. “음악이 끔찍하다”던 말이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었다. 부러 그런 음악을 쓴 게 아니라면, 아마도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음악에 그리 조예가 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다만 오카다 마리코 같은 미래지향적 V라인 안면의 미인을 배우로 기용한 것으로 보아 여배우에 대한 심미안은 높은 수준이었던 듯).


오카다 마리코(岡田茉莉子 1933.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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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는 다음의 말로 타케미츠와의 만남을 회고하며 끝을 맺는다.


그 뒤로 타케미츠 씨가 병으로 쓰러져서 결국 그때의 만남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지만, 내가 먼저 돌아가게 되었을 때, 레스토랑 밖에까지 나와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시던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애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못된 짓을 하는 듯한 기분으로 전단지 따위를 살포했던 것 같다. 일부러 전단지를 만들고 그걸 나눠주고 다니다니, 그런 번거러운 짓은 특별한 열정이 없어서는 하지 못한다. 일종의 러브레터 같은 것. 타케미츠 씨는 처음부터 그런 걸 다 알고 나를 받아주셨는지도 모른다.


-2014. 11. 29.

류이치 사카모토(1952-2023)


영화 <바벨>의 배경 음악으로 쓰인, 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 곡 <Bibo no aozora>.

현대적 감성이 돋보이는 명곡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서전에 의하면, 류이치 사카모토는 학창 시절에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가 환생한 게 바로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과대망상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음악을 들으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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