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인연'이 뭔데?
오래전, 클래식기타에 미쳤던 시절에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기타리스트 가즈히토 야마시타는 초인적 속주(빨리 치기)가 가능한데 왜 나는 안 될까?’
혹자는 말한다.
“그야, 야마시타는 뼈를 깎는 노력을 한 반면에, 너는 한참 부족하니까.”
인정한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누적 연습 시간이 나보다 적을 수밖에 없는, 아주 어리지만 전광석화 같은 기타리스트가 있으니까.
대만의 '곽준홍' 얘기다.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환생’이다.
리처드 버크가 <갈매기의 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통해 다음 세상을 선택할 수 있다.' 고로 작금의 내가 그들만큼 빠르지 못한 이유는 '전생에'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의문은 남는다. 현생의 나는 전생의 나와는 ‘생김’도 다르고 ‘기억’도 다르다. 그렇다면 과거의 ‘나’를 현생의 ‘나’와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요컨대 자기-동일성의 문제다.
‘나’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핵심은 뭘까? 외관? 아니면 기억?
아니, 본질적인 핵심이라는 것 따위가 있기나 한 걸까?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현빈(여현수 분)으로 환생한 태희(이은주 분)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현빈이의 본질을 규정하는 걸까? 그래서 인우(이병헌 분)는 현빈에게 태희의 모습이 없어도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걸까?
그럼 인우가 최초로 태희를 만났을 때는 그녀의 본질적인 무엇에 혹했던 걸까? 최초 만남의 순간에는 기억이란 아예 없었으므로 그것은 본질은 될 수 없다.
그럼 역시 외관?
혹자는 ‘영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개념 자체가 너무 모호하다.
(대체 '영혼'이란 게 뭔데?)
에리히 프롬은 ‘첫눈에 반함’ 따위는 사랑이 아니라고 했지만, 반면에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첫눈에 반하는 게 아니면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다. 후자의 입장을 견지한다면 결국 외관에 홀린 이후로는 공유된 기억이 덧대어지는 것이 연애 감정의 전부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격과 인간성에 반했다’는 건 사후(事後)에 덧댄 것에 불과하다고.
오래전에 좋아했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남자의 모습을 하고서 내게 다가온다면 나도 번지점프를 하게 될까?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혐오하는 건 아니지만 외관에 집착하는, 이성애자 남자로서의 내가 솔직히 그럴 가능성은 제로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난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니면… 불교의 가르침대로 자성(自性)이 없는 윤회라도 믿어야만 하는 걸까?
'나'라는 아상(我相)이 없는 윤회를.
따라서 최초의 의문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왜 야마시타는 토끼이고 나는 거북이인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한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명대사 :
"이 세상 아무 곳에다 작은 바늘 하나를 세우고 하늘에서 아주 작은 밀씨 하나를 뿌렸을 때 그게 그 바늘에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확률로 만나는 게 인연이다"
'그 계산도 안 되는 확률'로 마주치는 걸 '우연'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확률이란 우발성(우연)의 문제이지 필연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확률'이 전제된 필연성은 이미 필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일단 그 우연이 발생하고 나면, 마주침의 대상들은 그것을 필연이라고 믿는다. 그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는 우발성으로부터 탈각(脫却)하고픈 욕망의 반영일까?
하지만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 만남에는, 마주침의 주체들의 의지를 뛰어넘는 외부적 결정 인자가 무수하게 존재한다. 일단 두 사람이 마주친 이후에는 마주침을 조장한 무수한 우연들을 소급해서 찾을 수 있는 거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내가 만일 그 당시에 578번 버스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너를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 신발 끈이 풀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신발 끈을 묶느라 버스를 놓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 이전에 구두가 더럽혀지지 않았다면 끈 달린 운동화를 신고 나올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 이전에 전날 밤의 만취만 아니었다면 웅덩이에 발을 빠뜨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 친구가 실연만 하지 않았어도 위로의 술자리는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며, 친구의 여자친구가 갈증을 느끼지만 않았어도 우연히 들른 편의점에서 그녀의 옛 남자 동창을 만나 마음이 흔들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의 회사 동료가 사다 준 도시락의 염분이 과다하지 않았다면 갈증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무한소급)'
결국 '내'가 '너'를 만나게 된 건 내 자유의지 밖의 일이고, 따라서 내가 개입할 수 없는 뭔가 알 수 없는 '운명'이 '우리'를 만나게 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상한 얘기다. 결정론적 개념이 내포된 '운명'이라는 필연성이, 무수한 우연들의 총합에 기인한다니.
상극의 개념으로서의 '우연'과 '필연'이 중첩되는 기묘함. 이 기묘함을 해소하려면 위의 모든 우연의 미로를 미리 예측하여 조직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해야 할까? 마치 영화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처럼.
그렇다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무한에 가까운 다면체로 이루어진 주사위를 굴리는 것일까?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고대 로마의 무수한 깡패/변태 황제들의 계보에서 이탈한 5현제들 중에서 가장 빛났던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이 세계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조화와 융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우주가 모든 개체들이 모이고 조화하여 하나의 현존하는 완성체가 되어 있듯이, 현존하는 모든 원인들로부터 필연, 즉 운명이라고 하는 하나의 커다란 원인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무지한 사람들이라도 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다. 즉 그들 역시 '이러이러한 이들에게 이러이러한 일이 닥치는 것은 필연(운명)이다. 그것이 그에게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다.(...)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그것이 설령 불쾌하고 못마땅하게 여겨지더라도 감수하도록 하라. 왜냐 하면 그것들은 바로 우주의 건강과 제우스의 번영과 행복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지한 사람들'을 넘어 백치에 가까운 상태라 그런 것인 지는 잘 모르겠으나, '현존하는 모든 원인들'이란 실상 우연의 다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결국 필연이란 통시적인 우연의 다발에 불과한 것일까?
정신적 경련이 인다....
-2013. 8. 13.
역시 생각이 많으면 인생이 고달프다.
-2025. 10.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