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의 어려움
꽤 오래전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떴다.
강신주의 확신에 찬 직설, 불편한가요?
강신주 쌤은 이렇게 직설했다.
"힐링은 미봉책입니다. 제일 싫어하는 말이 힐링이에요. 자기 맨얼굴을 봐야 해요. 그러기 위해 냉정하게 얘기해 줘야 해요. 어떻게 할래,라고 깊게 얘기해 주는 건 힐링 같은 위로랑 다르죠. 우리 사회가 그런 게 많아요. 본질적인 걸 못 가르치고 미봉하는 게 많죠."
"영원한 것을 사랑하는 건 아이예요.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게 어른이에요."
"꿈을 갖는다는 건 무서운 저주예요."
"꿈은 두 종류가 있어요. 개꿈, 내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 노력을 안 하는 거. 진짜 좋은 꿈은 실천을 강요해요. 철학자는 그걸 이상이라고 불러요."
"자기 자신의 맨얼굴로 사랑하고 사랑받아야죠. 가면을 쓰는 순간 안전한데 고독할 수도 있어요. 가면을 쓰려면 죽을 때까지 절대 벗지 말고 쓰고 살아야죠."
오늘은 맨얼굴과 가면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다.
예전에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확신하건대… 피아니스트 에프게니 키신은 기교를 중요시할 터이다."
'확신'과 '~터이다(추측)'가 공존하는 이상한 문장이다. 이 점에 대해서 작가 최윤이 자신의 에세이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일상대화에 널리 퍼진 수사법 중에 '~한 것 같다'는 표현이 있다. 한 사고를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일종의 이 완곡한 표현이 유행하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늘 흑 아니면 백의 단정적인 표현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 어법이 묘미 있는 것으로 드러날 수는 있으나 너무 분명하고 누구나 다 아는 일차적 진실을 얘기하면서 '것 같다'라고 덧붙이는 데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확실히 ~한 것 같다'라고까지 말해 어떻게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이 어울릴 수 있는지 자문하게 한다. 이런 표현 속에는 외교적 완곡성보다는 말하는 사람이 그 자신의 생각에 대해 가지는 자신 없는 불투명성이 노출되며, 더 나아가 스스로 발생한 내용에 대한 책임까지를 모호하게 회피해보고자 하는 복합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마치 정확한 의사표명이 누라도 끼칠 것처럼, 표현된 것을 얼버무려 지워버리는 표백제 어법들이 덧붙여진다. …이 습관은 주체가 얼마나 축소되어 있고 그런 만큼 그 문화가 얼마나 정신적인 혼란을 겪고 있는지를 표현해 주는 예들이다.
-최윤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중에서
예리한 지적이다. 나는 위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한 것 같다'나, '~할 테다'같은 문장을 쓸 때는(꽤 자주 쓴다…) 어쩌면 있을 지도 모를, 오답을 확신함으로 인한 개망신을 회피하려는 심리가 반영된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으니까(반성할 일이다).
심지어는 그런 심리에 대한 송구함이나 가책(?)에 대한 반동심리로 말미에 '아님 말고'를 툭 내던질 때도 있다. 예컨대,
내가 보기에 현재의 수지는 <건축학개론>애서의 수지보다 훨씬 예쁘다.
뭐, 아님 말고.
좀 약한가? 그럼 다시.
우리는 지구가 구체라는 거대한 사기극에 휩싸여 있다. 지구는 사실 평면이다.
뭐, 아님 말고.
아예 대놓고 '내 말이 틀리면 할 수 없고'라는 투의 무책임 발언이다. 민망함의 무게를 덜고 싶을 때는 이처럼 '배째라'는 식의 뻔뻔한 가면을 쓰는 거다(이래서 '글은 곧 필자의 정신'이다).
그런데 그게 전적으로 문장 작성자를 향한 비판에 대한 면피에의 의지가 반영된 탓만은 아니다(지금 이 문장을 쓰면서 '반영된 탓 만은 아닌 것 같다'라고 쓸 뻔했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자기 확신의 화법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아니, 한몫을 한다.)
언젠가 모 음악 사이트에서 "롤랑 디앙(Roland Dyens)의 곡 <탱고 앤 스카이(Tango en ski)>에 나오는 '라-시b-도#-미-솔-시b-도#-미'의 진행은 화음인가요, 아니면 스케일(음계)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해, 이것이 스케일이냐 화음이냐의 문제로 거친 공박이 오가던 적이 있다. 나는 이렇게 댓글을 달아 주었다.
"제 생각에는 화음이지만, 스케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말다툼하는 두 하인을 중재하는 황희 정승의 심정이었을까?
황희 : 왜 다투고 지랄 소란들이냐?
하인 1 : 저 개자식이 연모는 한낱 호르몬 작용에 불과하다고 합니다요.
황희 : 그게 틀렸다는 말이냐?
하인 1 : 나으리, 그것은 점례에 대한 저의 정신적인 연모를 모욕하는 말이옵니다.
황희 : 그래서?
하인 1 : 연모는 지극히 정신적인 것입니다요, 나으리.
황희 : 흠.... 네 말이 옳다.
하인 2 : 나으리, 그것이 아니옵니다. 저 놈은 며칠 전에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요.
황희 : 말해 보거라.
하인 2 : "야, 넌 언년이 언제 꼬실거냐? 언제까지 용두질이나 하면서 자기 위로나 할 거냐고"라고요.
황희 : 그렇군. 그래서 네가 하고픈 말은 무엇이더냐?
하인 2 : 저 자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이옵니다.
황희 : 그러한가?
하인 2 : 연모는 실상 지극히 육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요.
황희 : 흠... 네 말도 옳다.
황희 정승은 그렇다고 치고, 나의 답변은 참 비겁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예나 지금이나 100% 화음이라고 확신하니까. 정확한 답은 "A7(b9) 코드의 아르페지오(분산화음)입니다."이다.
틀리면 내 전 재신과 오른팔을 건다.
그럼에도 황희 정승처럼 말한 이유는 '확신에 찬 직설'을 한 이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돌 맞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오답을 주장하는 분들의 심기까지 배려하는 것이 처세에 좋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명.... 아니, 영악했다고나 할까.
직설하다가 개박살이 난 이가 있다. '불사파'라는 조직의 행동대원 아무개 씨다. 그는 '육상에서 현정화가 금메달을 땄다'는 조직 형님의 오류를 정정해 주다가 먼지 나게 얻어터진다.
"임춘앱니다. 형님."
"......(다른 조직원 부하들에게) 나가 있어."
열나게 얻어터지는 아무개 씨.
"들어와!"
들어온 조직원 부하들에게 일장연설을 하는 형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며) 자, 자, 잘 들어. (...) 내, 내가 '현정화!' 그러면 무조건 현정화야! 내 말에 토, 토, 토, 토다는 새끼는 배, 배, 배반형이야. 배신, 배반형. 알겠어?"
아무개 씨가 "임춘앱니다, 형님."이라고 말하는 대신 "저... 임춘애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조금은 덜 처맞았을지도 모른다.
간혹 온라인상에서 피 터지게(?) 다투는 것을 보게 되면 저게 단지 모니터 뒤에 숨어서 그런 건지, 대면시키면 실제로 피 터지게 싸우게 될지 문득 궁금해진다.
확신에 찬 직설을 거북하게 받아들이는 것… 확신에 찬 직설에서 화자의 독단을 읽어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수용하는 쪽의 비관용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외교ㅡ사회생활 또는 인간관계를 위해 요구되는 완곡한 표현들이 있다.
"선생님께서 애써 소개해 주신 학술회의에 꼭 참가하고 싶었지만, 밥벌이가 발목을 잡아 불참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위의 말 대신 "밥벌이하느라고 불참합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돌아오는 평가는 아마도,
이런 개싸가지....
... 가 되지 않을까?
완곡한 외교적 수사는 사실 본심의 은폐를 위해 구사되기도 한다. 오래전에 그다지 친하지 않은 지인 A가 내게 기타 레슨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레슨을 해야 한다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요즘 급히 맡은 일이 있어서 자리를 뜨기 힘든 상황이라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본심은 이렇다.
귀찮아요.
또는,
시간당 얼마?
보다 디테일한 속내는 이렇다.
"아, 그거요? 그거 기초적인 것만 설명하는 데에도 하루가 꼬박 걸려요. 인생은 짧고 시간은 귀한데 어떻게 그걸 설명하느라 하루를 소비하겠어요? 문제는 하루를 투자해서 그것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고 해서 그것을 당장 수행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남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정도로 숙달시키려면 최소한 6개월 정도의 수련이 필요해요. 알렉스 퍼거슨 경이 내게 축구 감독의 노하우를 몇 시간 전수해 준다고 해서 내가 당장 감독직을 수행할 수 있겠어요? 날로 먹지 마세요. 그런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심기까지 배려하려는 과민한 노력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그렇다고 무작정 페르소나(사회적 가면)를 벗어버리고 맨얼굴로 처세를 한다면?
어떻게 되긴. 사회적 생매장이지, 뭐.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주장은 명료하게
처세는 흐릿하게
아니, 그보다는,
주장은 딱 부러지게
처세는 부드럽게
위 사진의 악당 3인조를 보니 문득 에드거 앨런 포우의 소설 <적사병의 가면>이 떠오른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스포일러 주의).
시대적 배경은 전염병이 창궐한 중세의 어느 시기다. 귀족들은 적사병을 피해 성처럼 지어진 수도원에 피신한다. 외부의 전염병 환자의 출입을 차단하기 위해 빗장을 땜질해 버리고 바깥의 농노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권태를 잊기 위한 자기들만의 유희-가면무도회를 벌인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불명의 가면을 쓴 인물이 무도회장에 나타난다. 귀족들은 그의 가면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다가 점차 혐오하며 경악스러워한다. 그의 가면은 바로 죽음을 연상시키는 '적사병의 가면'이었던 거다.
분노한 귀족들이 그를 붙잡아 바닥에 눕힌 다음 강제로 그 혐오스러운 가면을 벗겨내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가면은 벗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적사병의 가면'은 원래부터 가면이 아니었으니까.
귀족들의 이기적 유희에 증오를 품은 어느 적사병 환자가 적사병을 퍼뜨리기 위해 외부로부터 잠입했던 것이다!
이 얘기에서 귀족들의 횡포와 이기주의를 읽는 것이 온당한 독법일 테다. 나는 부러 다른 관점으로 읽는다.
예절과 규범, 그리고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은 페르소나에 익숙한 존재들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맨얼굴'을 용납할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 직설적 진솔함은 질병인 것이다.
그러나 페르소나의 귀족들은 '맨얼굴'에 의해 진멸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예절의 가면이 위선의 철면피로 변태 되어 버리는 병적 존재인 한.
아마도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한, 나만의 오독일 것이다.
-2014. 2. 4.
<Never mind>의 초대박으로 인해 전작 앨범인 <Bleach(표백제)>는 커트 코베인의 맹아가 보이는 정도로만 평가되기 십상이지만, 데뷔 시절부터 그는 이미 완성된 싱어송라이터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Nirvana의 음반들 중 마이너 레이블에서 발매된 이 데뷔 음반이 제일 맘에 든다. 이 음반의 수록곡들을 들으면 막힌 혈관이 뻥 뚫리는 느낌이랄까. 정말이지 커트 코베인은 천재인 듯싶다.
첫 곡 Blew에서의 '개-허접' 기타 솔로(비아냥 아님)를 처음 들었을 때 아마도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표백제 어법의 유혹을 온전히 떨쳐내는 일이란 얼마나 지난한가.
그냥 계속 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