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미문일까?
문득 술 한 잔 생각이 나고 출출할 때, 간혹 족발 안주에 소주를 마시곤 했다.
요즘 같은 개털의 시절에는 간단하게 '오이+고추장+막걸리'로 때운다.
건강하게 저렴해졌다.
술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신의 물방울>이라는 제목의 와인 관련 만화책 생각이 난다.
거기서 등장인물들이 와인 한 잔을 마시며 던지는 멘트들이 가관이다.
"무화과, 금감, 부엽토 그리고 희미한 민트와 시나몬... 얼마나 다이내믹하고 사방으로 터지는 듯한 여운인가.... 작은 과일을 깨물면 거기서 새로운 태양이 탄생하는 것 같아. 그러면서 우아하고 고요한 대지이기도 해."
아주 시인 나셨다.....
이런 멘트는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인 <명가의 술>에서도ㅡ조금은 봐줄만한 정도로ㅡ등장한다.
"이 생(生)술밑(주모)의 중후함과 그걸 잊게 만드는 산뜻한 맛... 꼭 가냘프면서도 뿌리는 땅 속에 깊숙이 박고 있는 꽃 같아요...."
미각의 시각화인가?
공감각적 미주가(美酒家)의 장인들, 대체 이분들은 술을 마신 걸까, 아니면 향정신성 약물을 복용한 걸까?
나도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산들바람과 농부의 땀을 한껏 품은 대지의 벼이삭이 삭풍의 근심을 모르는 순수함으로 영그는 9월 아침의 이슬 같은 맛과....."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한때 손발이 오그라드는 글쓰기를 남발한 적이 있다. 연애편지를 쓸 때다(E-메일이 없던 시절이다).
남용은 대필의 경우에서만이다. 왜냐고?
대필을 부탁한 이들이 그런 걸 좋아했으니까.
잘 썼냐고?
현대판 시라노의 편지는 말미에서 확인하라.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미문(美文)은 오글거리는 것일까?
아니, 오글거리는 미문이란 대체 무엇일까?
작가 전상국 쌤은 <소설 창작 강의>에서 미문(美文)에 대해 이렇게 썼다.
좋은 문장을 방해가 되는 또 하나는 지나친 미문의식이다. 좋은 글은 물론 문장이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을 효과적으로 담았을 때만 가치를 갖는다. 더구나 소설문장은 아름다운 문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지나친 미문의식은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을 흐려놓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름답게 꾸민 말과 글귀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흐려놓거나 그것의 진실됨 혹은 절실함을 잃어버리게 한다. 진실함 혹은 절실함이 없게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말과 글귀로 위장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
자세히 들여다 본다.
수식어(형용사어/부사어)를 많이 쓰는 문장은 그 문장 속에 담고자 하는 내용이 빈약하거나 그 내용에 자신이 없음을 보여줄 뿐이다.
오... 그러고 보니 스티븐 킹 쌤께서도 그러지 않았나.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라고.
전상국 쌤께서 든 예문은 다음과 같다.
-그렇게 아름답고 화려한 그 예쁜 신부의 고운 얼굴이 어느 순간에 비애와 크나큰 절망으로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비는 좔좔 억세게 내리고 유리창을 마구 흔들며 줄줄 흘러내리고....
몇 가지만 더 소개해 본다. 전상국 쌤은 "같은 문장 속에 동의어를 중복해 쓰는 일도 지나친 미문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라고 하며 다음의 예를 든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희번한 새벽의 푸른 햇살이 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비애와 슬픔과 아픔을 하소연할 길이 없음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광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하나만 더 소개한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어휘는 글의 사실성과 실감을 반감시킨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어휘의 남용도 글 내용을 생경하게 만들기 쉽다.
이에 대한 예문은 다음과 같다.
-회색빛 우울, 의식의 협곡, 상심의 우물, 청자기색 여명이 돋아나고 있었다. 상념의 늪. 눈은 인광을 품은 듯이 형형했다. 암암히 빛나던 그의 눈빛. 궁핍한 표정. 고독의 심연. 사무치는 연민에 몸서리를 쳤다. 뼈저린 슬픔. 신선함과 풋풋함. 각질의 표피 속에 자신을 무장해야 했다. 강파른 모성, 기적과도 같은 한가닥 은밀한 소망. 기쁨의 은빛 도취.
이에 대해서도 스티븐 킹 쌤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묘사를 잘하는 비결은 명료한 관찰력과 명료한 글쓰기인데, 여기서 명료한 글쓰기란 신선한 이미지와 쉬운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신선한 이미지의 진부하지 않은 쉬운 어휘를 사용할 것. 다시 말해 클리셰(진부한 표현)와 아는 척 금지. 전자의 경우 마르셸 프루스트도 꽤 강조했던 사항이다. 알랭 드 보통은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서 이렇게 썼다.
프루스트의 답장에 따르면, 이보다 더 그를 괴롭혔던 사실은 언어적 규약을 따르는 것이 항상 옳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무슨 말을 할 때에는 독창적이 되기보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의 말처럼 들리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구사하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클리셰의 사용이었을 것이다.
만약에 프루스트가 우리나라 뉴스의 앵커와 아나운서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면 낯짝이 화끈거렸을 것 같다.
"영하 13도의 한파가 들어닥친 후 한동안 동장군은 물러나지 않은 채…"
"오늘 인천 공항에서는 10만 명의 인파가 썰물이 빠지듯 해외로…"
"술 취한 20대가 한밤중에 광란의 질주를…"
"야박한 인심에 마음은 꽁꽁 얼어갑니다."
상투적 표현을 배제한 뉴스를 한다면 어떨까? 나름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가정불화로 인해 가출한 10대 남녀 청소년들이 부탄가스와 본드를 사랑의 미약처럼 흡입하며 질펀하게 야합하다가 댐에 막힌 강물처럼 동맥경화로 인해 김 모 씨는 상대 여학생 정 모 씨의 배에서 요단강 건너는 배로 갈아탔으며…"
"내일의 날씨입니다. 내일 오후에는 칼국수 같은 비가 바지락바지락 내리다가, 밤부터는 가을을 재촉하는 별들의 소리(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초가을 밤의 청공을 적시는……"
시인 안도현 쌤은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에서 시를 쓸 때 배척해야 할 세 가지 사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촌철살인의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가 고백적 양식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게 세 가지가 있다. 당신은 시를 쓰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이것들을 과감하게 배척해야 한다.
첫 번째는 과장이다. 제발 시를 쓸 때만 그리운 척하지 마라.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낭만으로 색칠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우습다.
두 번째는 감상이다.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 마라. 눈물 흘릴 일 하나 없는데 질질 짜지 마라. 그런 것들은 역겹다.
세 번째는 현학이다. 무엇이든 다 아는 척, 유식한 척하지 마라.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들먹이지 마라. 기이한 시어를 주워와 자랑하지 마라. 시에다 제발 각주 좀 달지 마라. 그런 것들은 느끼하다.
세 번째 지적은 스티븐 킹 쌤이 언급한 '쉬운 말을 사용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위에서 안도현 쌤은 현학적 글쓰기에 대해 '느끼하다'고 했다. 그런데 어디 현학적인 것에 한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감정의 과잉이나 표현의 진부함을 넘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연결이 모호한 시적 문장도 느끼하다. 요즘 표현대로 하면 '오글거린다.'
에메랄드 빛 향기처럼 빛나는 그대의 치아.....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사양>에서, 가즈코가 우에하라에게 보낸 연서를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인생 헛살았구나.
이렇게 멋진 연서를 받아보지 못했다니.
군대에서 동기생들에게 대필해 준 연서를, 그들의 연모 대상인 그녀들이 읽었을 때 '인생을 헛살지 않았다'며 흐뭇해했을까?
그러기를 바란다.
위의 충고들에 힘입어(?) 가상의 대상에게 연서를 써 보기로 한다.
가능한 한, 위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최대한 반영하여 느끼하게, 혹은 오글거리게.
Dear 수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가 버렸는지.
빗물을 머금지 못하는 상심의 포도(鋪道) 위로
고엽이 목적 없이 쓸려가는 만추의 계절에 이 편지를 쓴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청공에 새겨놓은 실금처럼
내게 새겨진 화인들도 이제는 무심한 세월 속에 인고의 잿더미로만 남겨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네가 항로를 변경하던 날,
나로서는 이탈되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던 바로 그날에
내 마음은 이미 발화되어 비장탄처럼 거친 쇳소리를 내며 소멸했을지도 모르겠어.
그날 이후로 페시미즘의 세상을 심중에 인각하며 푸르른 압생트를 비소인 양 흡수했지.
중심에 결코 가 닿지 못하는 나선의 회전처럼 균형을 잃으면서.
그것이 지금까지의 처연한 삶이었어. 내 푸르른 청춘이 퍼렇게 녹슬어가던.
네가 남긴 흔적들을 읽는다.
주인을 잃은 책들.
<생의 한가운데>의 빛바랜 지면 위에 네가 남겨놓았던,
사랑, 소망, 영원이라는 낱말들.
변색된 잉크처럼 말라버려 공허의 세월 속에 박제된 글씨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결박된 내 청춘의 초상 앞에 보내진 영혼의 부고.
나는 희망한다.
나의 빈한한 부대 속에 새로운 술이 채워지기를.
비소가 아니라 녹용 같은 재생의 술로 채워지기를, 그리하여 내 삶이 갱신되기를.
양지 없는 내 생활에 한줄기 서광이 비추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채색한 삶의 회화가 종극에 이르는 때에, 만추의 고엽 같은 색채로 아름답게 채색되기를.
회벽의 빛나는, 가을날의 빛깔이 너의 삶을 증명할 수 있도록.
Bye.
-2025. 10. 21
느끼하고도 오글거리게 쓰느라 고생 좀 했다.
'행인임발우개봉'이라고, 다 쓴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 본다.
음......
괜찮은데?
사족 :
위 편지 내용에 대한 적나라한 주석 :
-수지에게.
세월 존나 빨라.
가뭄 때문에 도로와 나뭇잎도 바짝 말라비틀어진 늦가을에 편지를 쓴다.
호구 취급 당하느라 실금이 간 내 자존심으로 인해 개빡치기를 몇 차례였던가.
근데 이제는 별 생각이 안 나.
아니, 어쩌면
네가 영철이 그 새끼한테 환승했던 날,
나로서는 까였다고 밖에는 생각하지 못할 그날에
나는 'ㅆㅂ, ㅆㅂ'하며 엄청 쌍욕을 퍼부은 후에 그냥 멘붕 상태에 빠져 버렸던 게지.
그날 이후로 '세상 참 X 같네'라는 생각을 반복하며 참이슬을 죽어라 퍼마셨어.
세상이 빙빙 돌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비틀거리면서(꽐라가 됐지).
그게 지금까지의 존나 불쌍한 내 삶이었어. 내 청춘은 너 때문에 종 친 거지.
네가 안 가지고 간 쓰레기들을 본다.
책들을 나보고 치우라고?
<생의 한가운데>라는 책의, 존나 후줄근한 종이에 뭘 써놨대.
사랑, 소망, 영원이라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쓰려면 지울 수 있게 연필로 쓸 것이지, 왜 볼펜으로 써서 중고책방에 팔지도 못하게 만드냐.
너 때문에 나는 지금 파산 직전이거든?
나는 존나 원해.
이 거지발싸개 같은 수렁의 인생에 제발 새로운 여자가 들어오기를.
너 같이 독사 같은 뇬, 아니, 여자 말고, 사슴처럼 착하고 어여쁜 처자 말이야. 나 좀 제대로 살아보게.
칙칙한 내 삶에 이제라도 광명이 비춰야 되지 않겠냐?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그 새끼랑 선택한 삶이 막바지에 이르러 밥숟갈 놓기 직전이 될 때, 갈색으로 칠해지기를.
병원 벽면의 빛나는 똥색으로 말이야.
꺼져.
-2025.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