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와 개털 사이

-부유하게 살고 싶지만 기타는 치고 싶어

by 지얼


중딩 시절의 어느 날에,

한 친구가 마이마이(구시대의 음악 감상 도구)와 영국의 4인조 밴드 스모키의 카세트테이프를 빌려주었다.

처음 이들의 음악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어폰을 통해 귓가에 들려오는 이들의 기타 음색이 너무나 청량했던 거다!

그에 반해 내 통기타는 멍청한 소리를 내는 '똥'기타였고.

글타.

2만 원짜리 똥기타.

차라리 페인트통에 넥과 줄을 달아 치는 게 소리가 훨씬 좋을 것 같은.


나중에는 <이웃집 앨리스>에서 연주되는 기타가 12현 기타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때 처음 지름교에 입교했을 거다.

그러나 지름신의 명대로 지르지 못해 똥줄이 타던 시절이었다.


스모키, <이웃집 앨리스>. 옥구슬처럼 영롱한 12현 기타 소리....


최초의 클래식기타 얘기도 해보자.

중딩이 시절의 어느 날, 학교가 파한 후 귀가 중에 어느 집 담벼락에 쓰레기들과 함께 놓여있던 클래식기타를 발견하였다. 추정컨대 아들놈이 악사가 되어 장래를 망치게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그 집 아버지의 의지가 상당 부분 반영되었으리라.


그 클래식기타는 3만 원짜리 세고비아 기타였다.

색상은 세련된(...) 그레이.

아... 그 기타로 나는 그 얼마나 무수한 명곡들을 연습하였던가.

러브 스토리

하얀 연인들

눈이 내리네

아이 돈 노우 하우 투 러브 힘

러브 이즈 블루

대부

로미오와 줄리엣

등등...


작금에 보기에는 최저가 똥클래식기타에 불과했음에도 당시에는 그걸로 연주하며 자뻑을 하고서는,

아...

클래식기타 소리는

정말 아름답구나....

.... 하며 감탄을 했었더랬다.

똥기타(스틸 스트링 기타) 소리는 못 참았지만 똥클래식기타(나일론 스트링 기타) 소리는 좋게 들렸던 모양이다.


스크린샷 2025-10-23 오전 10.17.43.png 이그나시오 플레타 기타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후, 나는 똥클래식기타가 아니라 세계적인 명기를 머나먼 미국의 L.A. 에서 손에 넣게 된다. 당시에 135부작 아침 드라마(라고 쓰고 막장 드라마라고 읽는다)의 음악 작업 의뢰가 들어왔기 때문에 보다 좋은 음색의 악기가 필요했던 것.

(그러나 귀국 후에 소식을 듣게 되었다. OST 작업의 계약 결렬이라는. 정말이지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웬만한 중형차 가격이었던 그 기타를 정말이지 열심히


모시고 살았다.


행여 크랙이 날까봐,

다습 상태일까봐, 또는 지나치게 습도가 건조할까봐.

밖에 들고 다니지도 못했다. 행여 술집이나 식당에 두고 올까봐, 카페에서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에 누가 훔쳐갈까봐.

문득 법정스님이 선물로 받은 난초를 키우시다가 그것에 발이 묶이게 됨을 알아차리고 무소유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악기라는 것은 기후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건조한 사막에서의 소리보다는 자연적 반향음이 있는 성당에서의 소리가 훨씬 좋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기후다. 환경은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기후는 어쩌지 못한다.

기후의 상태에 따라서 악기는 티코 자동차가 되기도 하고 페라리가 되기도 한다. 과장으로 들리겠지만 득음(?)을 한 처지에서는 미세한 변화에도 초-민감해진다(그래서 요리를 소재로 한 만화책에서 맛에 과민하게 구는 전문가들을 볼 때면 양가감정이 든다. 하나는 '뭐 저리 음식 맛에 난리야, 배가 덜 고픈가?'이고, 또 하나는 '단련된 미식가라면 그럴 수도 있지'다). 합판으로 대충(?) 만든 저가용 기타라면 모를까, 실상 원목으로 만든 고가의 악기일수록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것이다.

마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앙탈쟁이 장미꽃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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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샷 2025-10-23 오전 10.48.00.png 쌩텍쥐페리, <어린 왕자>의 삽화


그래서 나는 내 기타에,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에서 블라디미르를 괴롭히는 팜므파탈녀인 '지나이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마치 블루스 기타리스트인 B.B. King이 자신의 기타에 '루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처럼).

'지나이다'는 정말이지 예민했다. 이곳에 데려온 후 몇 달 동안 본래 자신의 소리를 제대로 내어주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해가 안 될 바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 되게 건조한 스페인에서 태어나 역시나 건조하기 짝이 없는 L.A. 를 전전했으니, 이곳의 고온다습한 기후를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결국 법정스님은 키우던 난초를 남에게 줘 버렸고, 어린 왕자는 장미를 두고 소행성 B-612를 떠난다. 나는 지나이다를 대만에 있는 어떤 남성에게 보냈다.

(모시기 힘들어서? 사실은 통장잔고의 압박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30년 전의 그레이색 똥클래식기타 소리에는 그렇게나 반색하던 내가 명기 지나이다(명기=이름난 악기)에게는 인상을 구길 때가 많았다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각 악기의 기후에 대한 민감도 차이가 워낙에 큰 탓이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내 귀가 30년 전과는 비교가 안 되게 예민해진 탓이 훨씬 클 것이다.

그렇다.

식자우환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리지만, 아는 만큼 괴롭다.

무언가의 존재, 혹은 실상을 제대로 알게 되는 순간 기쁨에 비례하여 과민의 스트레스도 증가한다. 이웃집 영숙이의 표정이 구겨져도 내 삶에는 변화가 없고 세상은 잘 돌아간다. 하지만 짝사랑하는 수지의 표정이 어두울 때 내 삶은 썩어들어가고 세상은 머잖아 망한다.

휴대폰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그것이 없다고 괴로웠던가? 내 구식 휴대폰이 괴로워지는 건 남들이 대개 스마트폰을 쓸 때다.

그렇다고 뭐, 원시공동체 생활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음악 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막귀'보다는 초-민감의 청각이 발전의 전제이니까.

식자우환은 어쩔 수 없다.



전기 기타(일렉트릭 기타) 얘기를 빼먹었다.

똥기타들로 학창 시절의 신산함을 오랫동안 견뎌내다가 고딩이 시절에 드디어 전기 기타에 꽂히게 된다.

당시에 처음으로 잡아본 일렉트릭 기타의 이름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소리나.

(가격 : 4만 원...)


소리나 기타를 똘똘이 앰프(방구석에서 사용하는 소형 앰프)에 연결하여 디스토션 소리 '꾸엑~~'을 처음으로 시전 했을 때 아마도 결심하였을 것이다.


나는 이 다음에 롹커가 되겠어


그것은 아마도 나락으로 향하는 인생의 시발(始發)이었을 것이다.

시발.

스크린샷 2025-10-23 오전 11.39.23.png


사족 :

예전에 학부모 입장에서 타도 대상 1호는 기타였다. 자식의 공부를 방해하고 종극에는 인생을 망친다고 생각했으니까.

작금에 학부모 입장에서 타도 대상 1호는 아마도 스마트폰이지 싶다. 그럼에도 작금에 아버지가 아들의 스마트폰을 집어던져서 박살내 버렸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과잉 도파민에의 부작용(짤, SNS, 쇼츠 등)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실용성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반면에 실용적 차원에서는 별반 쓰임이 없는, '예술지상주의적인' 기타는 종종 파괴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자식의 인생을 망치는 나쁜 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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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진짜 사족) :

-기타가 인생을 망치는 방법 :

1. 청소년의 경우, 공부를 등한시하게 만든다.

2. 전국구 스타라는 헛꿈을 꾸게 만듦으로써 소박한 삶에의 추구를 방해한다.

3. 후까시... 아니, 간지 작살의 삶을 추구하게 한다.


이게 가장 치명적이다.


4. '잘 나가지' 못 할 경우, 기타로 벌어들인 돈보다 기타(들) 구입으로 지출한 돈이 더 많아지고, 따라서 통장잔고는 비참해져 간다.


기타는 그냥 취미로 하고 다른 일로 돈을 많이 벌어 기타를 사고 싶은 만큼 사면 된다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싶다면 만류한다....


이미지 출처 : 유튜버 '공돌이 파파'. 썸네일 : "이 영상의 링크를 아내에게 카톡으로 보내 주세요.ㅋㅋㅋㅋ"
슬래쉬, <November rain> 뮤비의 한 장면. '오, 역시 간지 작살.....'
Guns & Roses, <November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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