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호천사

-아재 일기

by 지얼
스크린샷 2025-10-17 오후 9.13.47.png 샤를 페로의 동화 <당나귀 가죽> 삽화. 해리 클라크(1889-1931) 그림.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

깊게 잠들기 전에 현실의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어지러운 꿈이 단잠을 방해한다.

꿈꾸다 깨고 다시 꿈꾸다 깨기를 반복.

가끔은 현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꿈을 꾸기도 한다.

더욱이 꿈의 공간이 내가 살고 있는 장소와 동일할 경우에는 그 현실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대체 무슨 꿈을 꾼 건지(싸우는 꿈이라도 꾼 건지) 아침에 눈을 뜨면 협탁 위에 올려놓았었던 휴대전화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멀쩡한지 확인해 본다.

제기랄....


일진이 사나운 날이다.

교체한 지 얼마 안 된 휴대폰의 액정이 또 깨진 것이다.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까? 한 40만 원?

한 달 술값이다. 젠장....

게다가 이사 예정이었던 집은 뭔 폭탄을 맞은 건지 벽면이 허물어져 예정대로 이사를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정말 되는 일이 없구나.

짜증이 밀려온다.

알코올이 필요해....

인근의 한 술집에 들른다.

제기랄...


그곳에서 못 볼 꼴을 봤다.

적을 둔 교회의 한 여자 전도사님이 롹커인지 동네 양아치인지 분간이 안 되는 서너 명의 수컷들, 그리고 날라리인지 걸크러쉬인지 알 수 없는, 진한 화장을 한 어떤 처자와 어울리며 음주와 흡연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황했지만, '그래 뭐… 신부님도 음주와 흡연을 하는데 전도사님이라고 못할 거 있나' 하는 생각으로 추스른다. 그녀가 알은체를 할까 봐 급히 남은 술을 비우고 술값을 치른 후 술집을 나온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불면증인 것일까.


스크린샷 2025-10-23 오후 5.31.02.png


겨우 눈을 붙였나 싶더니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쿵쿵'하고 잠결에 들린다. 그리고는 비몽사몽간에 들려오는 문 바깥쪽의 목소리.

"그냥 비번 누르고 들어가."

눈이 번쩍 떠진다. 남의 방에 누가 함부로…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불쑥 들어닥친다.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킨 후 졸린 눈을 비비며 쳐다보니 주인집 아줌마다.

"아니, 페트병들을 왜 이리 쌓아놨어?"

뜬금없는 잔소리에 할 말을 잃는다. 여기 내 방이거든요?라고 말할 틈도 없이 주인아줌마는 냉장고 문을 열더니 지저분한 내부를 일별하고는 생수병 한 통을 꺼내든다. 뚜껑을 열더니 가져온 스테인리스 대야에 부어 버린다. 단수라도 된 것일까?

"아줌마! 그거 제 물이거든요?"하고 따졌지만 걍 쌩까고 그냥 무시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그녀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월세도 제 때 안 내는 주제에.....

'아니,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게다가 문도 안 닫고 가버렸다. 맷돌 손잡이가 사라지는(어이가 없는) 순간이다.

그래, 이 아줌마는 원래 막무가내였지. 이래서 이사를 가려고 했던 건데.

하지만 이사 예정인 집의 벽은 대포동에 처맞아버렸다.

빌어먹을.....


에드거 앨런 포우, <리지아>의 삽화


연속되는 불쾌감에 침대에 앉은 채로 망연자실하고 있는 도중, 또다시 현관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난다. 도어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누군지 모를 여성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하이힐을 벗지도 않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여자.

주인집 딸인가? 그렇다고 해도(내가 월세를 2개월 밀렸다고 해도)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내가 빚쟁이도 아니고 말이지.

그녀의 태도는 당당함을 넘어 거의 사채업자 수준이다. 고개를 들어 1미터 앞에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주인집 딸은 아니다. 가슴골이 살짝 보이는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술집에서의 그 날라리… 아니, 걸크러쉬다.


하이힐을 벗지도 않고 침대 위로 무릎 꿇어 자세로 올라오더니 재킷을 훌렁 벗어던지고는 나를 벌러덩 눕……히는 대신 웬 서류 한 장을 불쑥 내민다. 안도감과 실망감이 중첩상태에 놓인 채로 탄식하며 묻는다.

"뭡니까, 이게?"

"서명하세요. 우리 권투도장 입단 서류입니다."

이 뭔 뜬금포란 말인가.

어이가 없어 미동도 없는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본다. 어쩌면 언젠가 만취한 내가 이 여자의 꾀임에 넘어가 약속이라도 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다. 나는 오늘 낮에 이 여자를 처음 봤다.

서명은 얼어 죽을.

그녀가 서류를 얼굴 가까이 들이민다.

예쁜데?

나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운동을 너무 등한시했다. 근육이 한참 부족하다. 게다가 이 체중.... 곤란하다.

권투를 한번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 생각의 연기 속에서 그녀는 사라져 버린다.

걸크러쉬 그녀의 진한 라벤더 향기는 온데간데없고 권투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만 잔상처럼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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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해몽을 실행해 본다.

물론 100% 지 꼴리는대로의 자의적 해석이다.


-꿈 때문에 잠을 잘 못 자는 현실 : 이건 꿈이 아니고 팩트이다.

-휴대폰 액정이 깨지고 이사 갈 집의 벽이 파손된 것 : 전자는 팩트고, 후자는 꿈이다. 요즘의 불운, 혹은 불안의 기분이 꿈에 반영된 것.

-술집에서 불량남녀들과 전도사님을 보게 된 것 : 내 방탕한 생활의 반영. 전도사님은 나 자신의 죄의식을 투사한 것.

-주인아줌마의 무단 침입 : 방탕한 생활의 결과로 내 방의 소유권을 잃음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 생각의 반영.


그럴듯한데?

계속해본다.


-무단침입한 걸크러쉬의 강요 : 방탕한 생활로 건강을 잃을 수도 있으니 정신 차리고 운동에 매진하라는, 내 수호천사의 경고.

그렇다면....

내 수호천사는 걸크러쉬란 말인가?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잔상처럼 권투에의 욕망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 걸크러쉬의 권유가 꽤나 강력했던 모양이다. 꿈이란 참으로 얄궂다. 꿈이란 무의식의 발현이라는데 내 무의식이라는 놈은 나라는 인간을 이렇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간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도 여자를 통해 권유하면 실현 가능성이 높아져…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사람과 상징>을 펼쳐 본다.


아니마 : 내부의 여자

-어렵고 미묘한 윤리적인 문제들은 꼭 그림자(우리가 지우고 싶은 무의식적 악한 충동) 자체가 나타남으로써만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또 다른 "내적 인물"이 등장한다. 만일 꿈을 꾸는 사람이 남자라면, 그는 그의 무의식이 여성으로 인격화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융은 이 여성을 (...) 아니마(Anima)라고 불렀다.

(...)

개인적 표현에서 보자면, 남자의 아니마의 성격은 대개 어머니에 의해서 틀이 잡힌다. 만일 남자가 자기 어머니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느끼면, 그의 아니마는 종종 짜증스럽고 변덕스러운 기분, 불확실성, 불안정성, 과민함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가 그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공격들을 극복하면, 그것들은 그의 남성을 강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남자의 영혼 속에서 부정적인 어머니-아니마 인물은 끝없이 이런 주제를 되풀이할 것이다. "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지만, 나에게는... 난 아무것도 즐겁지 않다." 이런 "아니마 기분"은 일종의 둔함, 병에 대한 두려움, 무능, 사고의 원인이 된다. 삶 전체가 슬프고 억압적인 측면을 띠게 된다. 그런 어두운 분위기는 심지어 한 남자를 자살로 유혹할 수도 있으며, 그런 경우 아니마는 죽음의 악마가 된다.

(...)

아니마의 가장 흔한 표현들은, 에로틱한 환상의 형태를 띤다.(...) 이것은 아니마의 조악하고 원시적인 측면으로, 이것은 남자가 자신의 감정관계들을 충분히 개발하지 못할 때만ㅡ남자의 삶에 대한 감정태도가 유아적인 것으로만 남아있을 때만ㅡ강박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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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의 긍정적인 측면ㅡ내적 세계의 안내자 역할ㅡ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그런데 내적 세계의 안내자라는 아니마의 역할이 실제적인 관계에서는 무엇을 뜻할까? 이 긍정적인 기능은 남자가 아니마가 보내는 느낌, 기분, 기대, 환상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때, 그리고 그것을 어떤 형식ㅡ예를 들면 글, 그림, 조각, 음악, 춤ㅡ으로 고정시킬 때 나타난다.

-M.-L. 폰 프란츠, <사람과 상징> 제3장 [개체화 과정] 중에서.


삶에 대한 감정태도가 유아적이라니.... 아, 나로서는 도저히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의 걸크러쉬는 아니마가 아니다.

어쩌면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였을까?

단지 수호천사일 뿐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운동 좀 해라,라는 단순한 지침 이상의 무언가를(예컨대 야성적/원시적 삶을 구현하라는) 지시하는 건 아니었을까?


꿈에 어두운 상이 나타나 무언가를 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그림자(Shadow) 부분을 인격화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Self)의 인격화인가. 어쩌면 양쪽 모두인지도 모른다. 그 어두운 동반자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결점을 상징하는가, 아니면 받아들여야 할 의미 있는 삶의 한 방식을 상징하는가를 미라 판단한다는 것은 우리가 개성화 과정에서 마주치는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다.



Evanescence, <Lith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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