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하지 않은 자의 기도
암벽 등반을 하는 가족(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딸)에게 사고가 발생한다. 하나의 자일에 세 명이 매달리게 된 거다.
자일은 세 명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머잖아 끊어지게 될 것이다. 자일의 맨 아래에 매달려 있는 아버지가 바로 위에 매달린 아들에게 외친다. "자일을 잘라!" 하지만 아들은 그러지 못한다.
"세 명 무게는 절대 못 버텨! 하나만 죽느냐, 셋 다 죽느냐야... 동생을 죽일 거야? 어서 잘라!"
맨 위에 매달린 딸은 오빠를 만류하고, 떨리는 손으로 나이프를 꺼낸 아들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아버지의 요청대로 자일을 끊는다. 아버지는 추락하고, 두 남매는 살아남는다.
영화 <버티컬 리미트>의 한 장면이다.
여기서 질문.
아들의 행동은 정당했을까?
지하철의 출입문이 열리더니 날개 달린 시커먼 악마가 들어온다. 이것의 이름을 나는 알고 있다. '지퍼스 크리퍼스'다. 영화 속 괴물이 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와는 달리 면전에 앉아있는 나를 헤치지는 않는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금방 밖으로 나가 버린다.
장소가 바뀌고, 언덕에 위치한 가난한 동네의 단층집 방에 친구 상준(가명)과 내가 그다지 넓지 않은 방의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다. 방문이 열려있어 바깥 풍경이 다 보인다.
그때 지퍼스 크리퍼스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시커먼 얼굴을 면전에 들이밀면서 우리들을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심중을 읽을 수 있다.
'어느 놈을 잡아갈까?'
나는 생각한다.
'제발 나 말고 상준이를......'
다행히 꿈에서 깬다.
미안하다, 친구....
현타가 오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의 생각은 정당했을까?
자일을 끊은 아들에게는 구태여 공리주의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여동생을 구해야 한다는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 꿈속에서의 이기적인 자기 보존에의 욕망은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전자는 행동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생각에 관한 것이다. 생각(나 말고 상준이를...)만으로 정죄받을 수 있을까?
"자기 보존의 본능은 당연한 거잖아! 게다가 생각뿐이었는데 무슨 잘못?"
이렇게 묻는 이를 위해 꿈속 상황에 변화를 줘 본다. 다시 언덕 위의 그 집 안이다. 지퍼스 크리퍼스가 내게 묻는다.
"묻는 말에 대답해라. 대답 안 하면 둘 다 찢어 죽인다. 너를 데려갈까, 아니면 네 친구를 데려갈까?"
이 경우에 나라는 인간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다음의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천 길 만 길 낭떠러지 암벽에 자일 하나만 의지한 채로 여자 친구인 수지와 내가 매달려 있다. 두 명의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일은 천천히 끊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수지보다 위쪽에 있고, 나이프가 손에 들려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자일을 끊어버리게 될까?
끔찍한 상황이다. 나는 VR 속 가상의 빌딩에서도 고소공포를 느끼는 인간이다. 이런 내가 자일을 끊을 수 없다고?
"자기 보존의 본능은 어쩔 수 없는 거라니까! 누군들 같이 죽는 쪽을 선택하겠어. 둘 다 죽는 것보다는 하나만 죽는 게 낫잖아? 공리주의적 차원에서도 같이 죽는 건 옳지 않아."
사후에 아마도 이성은 그렇게 말할 거다. 하지만 감정의 판단은 다르다.
'저 살자고 사랑하는 연인을 죽인 나는 그저 쓰레기일 뿐이야...' 아마도 세간의 평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다.
그래서 <버티컬 리미트>에서 여동생 '애니'는 오빠인 '피터'와 손절한 채 살았던 거다. 애니 역시 피터가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은 아니라고 이성적으로 알 수는 있었을 테지만 감정은 그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빠 로이스를 너무나 사랑했고, 그의 마지막 눈길이 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리라.
전체주의 국가인 '오세아니아'에 대한ㅡ지도자인 '빅브라더'에 대한ㅡ 반역자로 낙인찍힌 주인공 윈스턴은 체포된 뒤 상사인 오브라이언에게 질책을 받으며 '101호실'로 이감된다. 결박된 윈스턴에게 오브라이언이 말한다.
"언젠가 자네는 101호실에 무엇이 있느냐고 나한테 물은 적이 있었지. 그때 나는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자네가 이미 알고 있다고,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고 대답했었네. 101호실에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일세."
오브라이언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들ㅡ생매장, 화형, 익사 등 ㅡ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네의 경우에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건 쥐"라고 말한다. 공포에 떠는 윈스턴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네. 인간이란 죽을 고비를 만나더라도 고통을 참고 버티어내는 경우가 있지. 그러나 누구에게나 참을 수 없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 있게 마련일세. 그건 용기나 비겁함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지.(...)"
"쥐는 설치류이지만 육식도 하지. 자네도 알고 있겠군. 이 도시의 빈민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을 걸세. 어떤 지역에서는 오 분간도 아기를 집에 혼자 놔두지 못한다네. 쥐들이 덤벼들어서 말일세. 놈들이 순식간에 아기를 뜯어먹고 뼈만 남겨놓는다는군.(...)"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쥐들의 먹잇감으로 던져 넣으려는 것이다.
"(...) 자네는 쥐가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걸 본 적이 있나? 쥐들은 자네의 얼굴로 뛰어올라 살점을 마구 파먹을 걸세. 어떤 놈은 눈부터 파먹겠지. 또 어떤 놈은 뺨을 뚫고 들어가서 혓바닥을 씹어 먹기도 하고 말일세."
윈스턴은 스스로를 구할 방법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와 쥐 사이에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의 몸뚱이를 갖다 놓'는 것이다.
그때 구원, 아니 구원이 아니라 희망, 한 조각 희미한 희망의 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 세상에서 자기 대신 형벌을 받을 수 있는 오직 '한 사람', 자기와 쥐 사이에 밀어 넣을 수 있는 '한 몸뚱이'가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그는 열에 들떠서 마구 외쳤다.
"줄리아한테 하세요! 줄리아한테! 제게 하지 말고 줄리아한테 하세요!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요.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도, 살갗을 벗겨 뼈를 발라내도 말예요. 저는 안 돼요! 줄리아한테 하세요! 저는 안 됩니다!"
이렇게 윈스턴은 자신의 연인을 팔아 대속의 희생양으로 삼고 만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후반부 내용이다.
그 일 이후 얼마 동안의 세월이 흐른 뒤, 윈스턴은 공원에서 우연히 줄리아와 조우한다.
그녀는 다시 혐오의 눈빛으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자주 당신을 위협할 거예요. 참을 수 없고, 생각만으로 끔찍한 어떤 것으로요. 그리고 당신은 '저에게 이러지 마세요. 다른 사람한테 하세요. 이러이러한 사람에게 하십시오.'라고 말하겠죠. 그러고는 나중에 그건 일종의 속임수였고, 고문을 멈추게 하느라고 그랬을 뿐이라고 둘러댈 생각을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뻔한 거짓말 아닌가요? 물론 그런 일이 닥치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죠. 목숨을 구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정말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걸 거예요.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길 바라는 거죠. 그래요. 그런 일이 닥치면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는 건 개의치 않고 오직 자신만 생각하게 마련이죠."
"그래, 오직 자신만 생각하게 마련이지."
그가 그대로 따라 말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전과 같지 않게 돼요."
"그래, 전과 같지 않게 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이 구절은 '우리를 유혹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위의 사건들을 염두에 두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번역이 더 와닿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런 기도문을 주었는지 알 것 같다. 아주 일부의 강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런 시험을 극복하기란 너무나 어려울 테니까. 반석 같았던 베드로도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나.
아니,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다시 말해 내 생명을 거는 일이 아닐지라도) 인생의 '시험에 드는' 경우, 이를 극복하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오래전에,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로 활동 중이었던 J 모 양을 오랜만에 만났을 때의 일이다. 대화의 소재가 '남녀관계'에 이르렀을 때, (송구하게도)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럼 J 씨는 결혼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없지는 않고요.... 다만 섣불리 하고 싶지는 않을 뿐이에요."
"섣불리... 라면?"
"만약에 내 남편이 뇌졸중 같은 병으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되었다고 해봐요."
"반신불수요?"
"네. 그럴 경우 나는 그래도 이 사람을 죽는 그날까지 사랑하며 병시중을 성심성의껏 들 수 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좀 극단적이네요."
"그렇긴 하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을 각오할 정도로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에요."
문득 스피노자의 <에티카> 마지막 문장이 떠오른다.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문 것임과 동시에 어려운 것이다."
주님께 기도한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고귀하지도 않고 흔해 빠진 존재로서의 나는 이게 바랄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