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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ㅡ2016년 어느 날의 일기

by 지얼


반려견인 '시베리안개스키'와 산책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 동아리 후배 현주(가명)다. 그녀가 말했다. "선배님 나온 사진들 중에 아무거나 제게 보내봐요."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한다. "선배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내 얼굴을? 누가?"

"유정(가명)이요. 지금 우리 동기들 오래간만에 만났거든요. 그러니까 잘 나온 사진으로 빨리 보내주세요."

잘 나온 사진?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원판이 후진데 사진이 어떻게 잘 나오냐? 그리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사진을 보내달래?ㅋㅋㅋ"


유정이라... 그녀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이었지. 물론 그 '우리'에 나는 제외되지만.


그 시절, 그녀와 같은 학과 동기이자 같은 동아리 동기였던 영철(가명)이가 그녀를 '아는 형'에게 소개함으로써 썸타게 만들었을 때,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내 동기 남자들 중 몇 명은 영철이가 동아리방에 나타날 때마다 그의 엉덩짝을 발로 걷어차며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이 개자식아, 시키지도 않은 짓을 왜 해?"


한 번은 동아리방에서 단체로 술을 '더럽게' 마신 적이 있다. 방법은 이랬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알 수 없는) 세숫대야에 막걸리 서너 통을 부어 넣은 다음에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오염시킨다(예컨대 신발로 젓기, 재떨이 빠트리기, 침 뱉기 등등). 그리고 마신다. 선배였던 나는 모범을 보인답시고 제일 먼저 시식을 하였는데.. 대체 뭐지? 왜 나 대신 마시지도 않은 애먼 놈이 토악질을 하는 걸까?

.... 이런 시대였다. 야만과 미망의 구석기시대.


술자리가 파할 무렵, 영철이는 만취로 인해 떡실신 상태였다. 그때 누군가 술기운에 장난기가 도졌는지, 검은색 매직펜을 들고 썩소를 지으며 영철의 앞에 섰다.

"흐흐흐흐....."

이후로 너도 나도(아니, 나는 안 그랬다....) 그의 얼굴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렸다. 코 옆의 고양이수염과, 뺨의 흉터 자국과 드라큘라 이빨까지. 그중에 가장 나쁜 건 이마에 뭔가를 적어 넣은 것인데..... 아마도 평소 영철이의 엉덩이를 걷어차던 인간들 중 한 명의 소행이 틀림없을 테고, 마빡의 글씨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애먼 놈한테 보내버린 것에 대한 사적 응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며칠 후, 후배 영철이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날 밤에..... 술에 취해서 정신없이 걸어가는데, 어떤 여자가 알은척을 하더라고요. '어머, 선배.... 안녕하세요?' 하면서. 그래서 내가 누군가 알아보려고 가까이 다가갔는데 같은 과 후배더라고."

"그래서?"

"갑자기 걔가 이러는 거예요. '어머.... 선배.... 얼굴에...' 그래서 '응? 내 얼굴에 뭐 묻었어?'라고 물었는데 그녀가 그러더라고. '선배 이마에..... 섹....'"

영철의 마빡에는 불순한 영단어가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던 것이다.

S....


내가 말했다.

"너무한 거 아니냐?"

영철이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치? 장난이 넘 심한 거 아니오? 나, 완전히 개망신당했다니까. 어휴, 쪽팔려."

"아니... 그거 말고."

"엉? 그럼 뭐가?"

"애먼 개자식한테 유정이를 넘긴 거!"


비록 유정이에게 사심이 없었더라도 후지게 나온 사진은 보내기 싫다. 하지만 몇 번을 찍어도 괜찮게 나온 건 없다. 당연하다. 구린 원본에서 개쩌는 복사본이 나올 리가 만무하다. 핸드폰의 셀카를 통해 비로소 내 안면의 상태를 확인한다.


아, 삭았다...

흰머리가 더 늘었다....


나는 거울 따위는 잘 들여다보지 않는다. 셀카도 거의 찍지 않는다. 만약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거나 셀카를 밥 먹듯이 찍을 수 있는 처지였다면 그나마 얼마 없는 효심이 조금은 더 생겼을는지도 모른다.

세수를 하는 도중, 이상한 놈이 게슴츠레한 짝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턱은 두 개고, 목은 머잖아 사라질 것 같다. 뱃속에서는 머잖아 에이리언 새끼 한 마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살이 찐 만큼 이목구비도 비례하여 커지면 좀 나을 텐데, 그러지 않은 탓에 예전보다 얼굴이 휑~하니 허전해 보인다. 평생을 봐 온 얼굴이지만 조명 탓인지 오늘따라 한 대 줘 패고 싶은 밉상이다.

거울 속에 오징어가 살고 있다.


가뜩이나 크지 않은 눈이 뇌경색의 후유증으로 더 작아진 건 그렇다 쳐도, 오른쪽 눈에는 없는 이 기다란 눈 밑 주름으로 인해 짝눈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건 대체 어인 일일까? 백내장으로 인한 시력저하로 꽤 자주 눈을 찡그린 결과인 걸까?

잠시 주름 제거에 관한 고민을 하다가 곧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이 나이에 주름 하나 없다한들 수지(어디까지나 제유법으로서의 '수지')가 따라다닐 것도 아니잖아?


눈 밑 주름에 대한 신경 쓰임은 타자의 시선에 대한 의식, 또는 수지의 얼굴을 향한 내 관심만큼 내 얼굴에 대한 타자의 관심도 클 것이라는 과대망상적인 착각인 셈인데, 실상 대부분의 타인들은 내게 관심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더욱이 신경 쓸 일은 없을 테다. 그럼에도 정신적으로 미숙한 나는 두 가지 상이한 반응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이 눈 밑 주름이 젊음의 흔적을 최종적으로 지웠어... 게다가 짝눈이 더욱 심화되었지. 젠장할... 수지야 안녕...'

'이 나이에 주름이 안 생기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짝눈이면 어때? 거의 모두가 관심이 없는 일 아닌가. 외려 주름은 삶의 지도와 같은 거다.'


이 오락가락의 반응조차 사라질 때 진정 외모와 정념의 세계로부터 해방이 된 것일 테다. 노화는 늘 KTX를 타고 있고, 수지는 그 속도에 비례해서 멀어져 간다. 그것은 미적인 것에 대한 접촉 가능성에의 체념이자 겉보기의 얄팍함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결국 역광을 이용하여 얼굴 윤곽을 흐리게 한 사진을 찍었다. 자연광 뽀샵이다. 이 정도면 "어머, 선배 많이 삭았다..." 하는 따위의 얘기는 안 듣겠지.

그리고 또 하나의 전략이 있었으니... 이른바 '시선 분산시키기' 전략이다.

이 전략에는 나와는 반대로 안면 대칭이 완벽하고 뭇 처자들의 탄성과 스킨십을 유발할 정도로 잘 생긴 시베리안개스키가 투입되었다. 시베리안개스키와 함께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다음 개중에 내 얼굴이 가장 덜 흉물스럽게 나온 것을 보냈다.


아.... 다 부질없다. 얼짱각도니, 역광이니, 노란 조명이니, 전략적 시선 분산이니 하는 따위의 것들이 고려될 필요가 전혀 없는, 다시 말해 세수를 며칠 동안 하지 않은 채 노숙자 꼴을 하고 다녀도 왠지 뒤통수에 후광이 비치는 듯한 인물(키아누 리브스 얘기다)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으면 그녀와 한 이불을 덮고 지낼 수 있었......


유정이..... 그녀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이었지.

물론 그 '우리'에 나는 제외되지만.



사족 :

아래의 글은 오늘 쓴 것.


문득 이석원 작가의 <보통의 존재> 177페이지를 보면서 공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사람은, 전생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데요. 전경린이 그랬어요. 나는 누구를 사랑해서 지금의 내 얼굴이 되었나. 당신은 또 누구를 사랑해서 당신의 얼굴이 되었을까."]

이에 이석원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전생에 이 얼굴을 사랑했다고?

이 얼굴을...?

믿기지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전생의 나에게 찾아가 한마디를 던진다.

너, 미쳤구나?


위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부터 현빈을 사랑하도록 애써야 할까? 그건 내가 성소수자가 아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하여,


사랑해, 원영아...

혹은,

사랑해, 카리나...



이도 저도 아니면,


사랑해, 하니야....


https://youtu.be/DMRN4wu9HQM?si=c3hLUVdqFARrhj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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