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너나 잘하세요
혜승(가명) 양이 오랜만에 나를 찾아왔다. 7년 전에 내게 기타를 배웠던 그녀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 한 달 반 만에 아이유의 <밤 편지>를 완주했던.
샤브샤브를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녀는 얼마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얘기의 요지는 이렇다. 처음 사귈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한두 달 지나서 보니 여자 친구인 자기에 대한 배려가 없어도 너무 없더라는 거다. “넌 내 타입은 아닌데 그냥 만나주는 거다”라고 했다니 말 다 했다. 이것 말고도 도가 지나친 것이 있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내용은 프라이버시 관계로 생략한다.
뭐, 물론 이런 경우를 두고 ‘마음이 변했다’고 말할 이는 아마도 없을 테다. 그는 그냥 자신의 본색대로 돌아간 것뿐이니까.
아니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달랐거나.
그녀가 말한 그 모든 것이 100% 사실이라면 그는 최대한 나르시시스트인 것이고, 최소한 자기중심적 인간인 거다.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다음에는 영화 <어바웃 타임>의 남주 같은 남자를 만나라고. 그의 아버지가 결혼식장에서 하객들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남자는… 친절해야 합니다. 우리 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 이런 남자가 진국이지. 차도남? 나쁜 남자? 츤데레? 다 꺼지라고 해.
또 이런 얘기도 했던 것 같다. “오랜 시간을 홀로 있다 보면, 아무나 만나게 되는 수가 있어요.” 이 말을 내뱉고 보니 아차 싶었다. 무엇보다 혜승 양의 선택이 그러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지적하는 말 아닌가. 그녀가 외로움에 지쳐 그런 놈을 만난 건지, 단순히 호감 때문에 시작했는지 내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대체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뭐라고.
두 번째는 이영애의 말이 마음의 소리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너나 잘하세요
내가 다음의 구절을 만난 것은 22세 무렵이었다.
[….. 그대의 사랑이 그대에게 가하는 강습을 경계하라! 고독한 사람은 만나는 사람에게 너무 쉽게 손을 내민다.
그대는 그대의 손을 너무 많은 사람에게 내밀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앞발을 내밀어야 한다. 그리고 그대의 앞발이 맹수의 발톱까지도 갖추기를.
ㅡ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인생이 책 한 권으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꾼 책이 제 인생을 바꿀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숙제처럼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은 없습니다.” 동감이다. 22세 때 읽은 위의 구절은 전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고독에 치여 ‘아무나’ 만난 결과, 그 ‘아무나’로부터 "어머, 너희 집 되게 서민적이다"라거나, "차 없으세요?"라거나, 또는 “만나면 뭐 하니, 그냥 전화만 하면 됐지”하는 따위의 소리를 듣게 되는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 테다(이것에 대해서는 언젠가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
어쨌거나 혜승 양은 내 말을 이해해 주었다. “맞아요. 그래서 당분간 남자는 안 만나고 혼자 지내려고요.” 그래, 바로 그거지. 파이팅!
잠시 말이 끊긴 틈을 타서 샤브샤브 국물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는다. 소주 생각이 간절했지만 운전을 위해 참기로 한다. 그 순간 혜승 양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전화를 받기 위해 그녀는 화장실로 향한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전 남자 친구?” 그녀가 웃으며 대답한다. “아뇨, 그냥 아는 후배예요.”
“그럼 다행.” 이런 젠장, 오지랖은.
그녀는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한다. “근데 나더러 자기 아는 사람이랑 소개팅하래요.”
“소개팅? 어떤 사람이래요?”
“벤처기업가래요.”
“그래서요?”
“네?"
“만날 거냐고요."
“그러려고요.”
문득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혜승 양에게 ‘당분간’은 일주일 정도구나.
하긴, 그 유명한 니체의 뼈 때리는 말도 결과적으로 봤을 때 ‘씹어버린’ 게 바로 나다. 하물며 그녀가 나 같은 범부의 말에 각골난망이 되겠는가?
연애를 책으로 배울 수 없듯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경험을 통해 배울 수밖에. 늙는다고 자동으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이 쌓이면 나름의 깨달음을 얻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고 보면 기실 책이나 명언 따위는 사후약방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변진섭의 노랫말이 떠오른다.
이별은 두렵지 않아
눈물은 참을 수 있어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해
이게 대체 뭔 소리일까? 이별은 두렵지 않은데 홀로 되는 것은 슬프다니. 홀로 된다는 슬픈 일 자체가 두려운 것일 텐데 이별이 두렵지 않다고? 홀로 된다는 것이 슬프면 그냥 다른 사람 또 만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별은 홀로 되어서 슬픈 게 아니라 바로 ‘그’와 헤어져서 슬픈 게 아닌가?
<어린 왕자>처럼 말하자면, 무수한 장미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의 대체불가능한 ‘그’ 장미와 다시는 못 보게 되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닌가?
혜승 양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았을까. “외로워서 지얼을 만나면, 훗날의 현빈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자학성 멘트의 불편함보다는, 역시나 쓸데없는 오지랖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그리고 또… 혹시 알겠는가. 외로움에 누군가를 만났는데, 운 좋게도 인간성 끝내주는 현빈일지.
문득 서정윤의 <홀로서기>라는 시의 시구가 떠오른다.
[(...)
홀로 산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
그러하더라도 부디, 그가 현빈이든 아니든 항상 혼자서도 잘 서는 사람이 되기를. 신경숙 작가가 <깊은 슬픔>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이에게 가는 길을 내지 말고 오로지 자신에게 가는 일에 길을 낼 수 있기를.
https://youtu.be/IFL2zFpSFe8?si=RLpF0iCX7CKPh8Q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