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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0123

by 지얼


초딩 6학년 미니(가명) 양이 내게 요청한다.

"쌤,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수업 시간을 소모하려는, 빤한 초딩들의 수작임을 간파한 나는 거부한다. "왜요?"라고 따지는 미니 양.

"왜냐하면.... 음..... 19금이거든."

이렇게 대충 얼버무린다. 그러고 나서,

"너희 학교에서 제일 예쁜 쌤이 누구냐?"하고 묻는다.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

"영어 쌤이요. 영어 쌤 진짜 예뻐요!"

"그럼 영어 쌤 소개해주면 기꺼이 첫사랑 얘기해 주지."하고 말했더니 잠시 나를 노려본 후 단호하게,

"안 돼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왜 안 되는데?"하고 물었더니

미니 양은 내게 직격탄을 날린다.

"쌤은 얼굴에 세월을 직빵으로 처맞아서 안 돼요."


나도 알아 임마........


"자, 이제 집에 가라."

"그러지 말고 쌤,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아무래도 해줘야 영어 쌤을.....아니, 집에 갈 것 같다.

"해 줄 테니 잘 들어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첫사랑 얘기를 해 줄 생각은 없다. 악몽은 재현하는 거 아니다. 대신 두 번째 사랑(아니, 세 번째였던가?) 이야기로 대신하기로 한다. 그것도 사건 일부만.



아주 오래전, 11월의 어느 날인가

수지(가명)와 경포대에 갔었지

가는 눈이 내리던, 겨울이 임박한 날에


해안가에 인접해 있는 카페 '윌'에서

쌉쌀한 마티니를 마시며

힐끔힐끔 수지의 눈을 보았는데

그림자가 어려있더군


그 카페에는 낡은 클래식기타가 한 대 있었어

그래서 클래식기타를 연주해 주었지

의기소침해 있는 그녀를 위해

스탠리 마이어즈의 <카바티나>를 연주해 주었어


실내에서는 <카바티나>의 음표들이

유리창에 반향 되어 부유하고

유리창에서는 눈이 녹아내리고

수지의 눈에서는 물이 흘러내렸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

아, 나의 연주가 그녀의 심금을 울렸단 말인가....

잠시 후 그녀는 내게 말했어

ㅡ나... 사실은... 그 사람과 헤어졌어


그녀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물이 흘러내렸지

내가 있는 곳 말고 머나먼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 눈에서

그때 비참한 마음이 들었어

나는 고작 그녀에게 배경음악 따위 밖에는 안 되는 거구나...


https://youtu.be/wSt4s6osxwU?si=u5pjnavjYUyoNbvd



"그래서요? 어떻게 되었어요? 쌤이 까였어요?" 미니 양이 묻는다.

"그건... 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미니 양이 재촉한다. "왜요? 얼른 더 해주세요."

나는 강조하여 말한다.

"영어 쌤을 소개해 준다면...."

미니 양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안녕히 계세요."

미니 양은 아마도 그 이후의 일을 영원히 듣지 못할 것이다. 하긴, 이미 해준 얘기도 집에 가면 다 잊어버리겠지만.


카페든 식당이든, 그 어디서든 실내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아름다운 그 시절에, 친구인 마초맨 근식(가명)이가 천호동 소재의 레스토랑 <아마데우스>에서 담배 연기를 뻑뻑 뿜어댔을 때였다.

"오빠, 제발 담배 좀 안 피면 안 돼?" 근식이의 여친이 연기를 몰아내기 위해 팔을 흔들며 말했다. "내 친구 영숙이는 남자친구가 담배와 술을 너무 많이 해서 다퉜대. 그래서 헤어졌나 봐."

마초맨 근식이가 내뱉은 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담배를 끊느니 널 포기하겠다."


수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라면 담배 따위는 물론 섭식도 당장 끊을 의향이 넘치고도 남았던, 배경음악의 존재 밖에 안 되었던 나는 주연배우 근식이와는 달리 '갑'이 아닌 '을'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그러니까 경포대에서 수지의 눈물을 바라보던 날보다 훨씬 이전에, 나는 '을'의 신세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 애쓴 적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유아적인 '질투 유발하기'의 발상을 한 거다.

(아, 미니 양은 다음의 얘기를 들을 수도 있었는데. 영어 쌤만 내게.....)

미니 양이 앞에 있다고 상상하며 얘기를 전개한다.




상심의 낙엽이 포도 위를 속절없이 구르던 어느 가을날,

동아리방에서 열심히 기타 연습을 하고 있었지

동기인 정구(가명)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하는 말이,

ㅡ야, 오다가 수지를 봤는데…어떤 놈이랑 단 둘이 교문 쪽으로 내려가던데?

애써 쿨한 척, 대답했지

ㅡ그러든지 말든지


그러고는 밖으로 나와 동방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같은 과 학우였던 동완(가명) 군이 자전거를 탄 채 내게 다가오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에게 잠시 자전거를 빌렸지

심란한 마음으로 동방 근처를 배회하던 중에

동아리의 존예녀 민희 선배와 마주쳤어

자전거를 잠시 세우고 내가 물었지

ㅡ누나, 어디 가요?

ㅡ집에

ㅡ그래요? 그럼 뒤에 타요. 학교 정문까지 태워드릴게요


그리하여 존예녀 선배를 태우고 비탈길 아래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전방 50미터 앞에 수지의 뒤태가 시야에 들어오더라고

누군지 모를 그 개자식은 온데간데없었고 홀로 은행잎이 뒤덮인 인도를 걷고 있었어

그냥 지나쳐 가면 될 걸, 구태여, 괜스레, 일부러 수지 옆에 일시 정차한 다음 자전거를 탄 채로 쿨~하게 물었지

ㅡ야, 어디 가냐?

ㅡ응? 아, 집에.

ㅡ그래? 잘 가.


그렇게 복수(?)를 완수한 나는 힘차게 페달을 밟았지

그렇게 내 허리를 붙잡고 있었던 민희 선배와 함께 수지 곁에서 멀어졌어

그리고


진짜 멀어져 버렸지.....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빙하기가 왔지

용기를 내어 수지의 생일 전날에 그녀에게 전화를 했어

ㅡ우리, 내일 만날까?

하지만 그녀는 무심하게 대답했지

ㅡ만나면 뭐 하니, 그냥 이렇게 통화하면 됐지.

그래...

이렇게 망한 거였어...


수지를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의 경과가 요구되었고

에어서플라이의 노래 가사를 음미하며

이불킥과 함께 기나긴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었지


…. all the days that pass me by so slow

(…) I'm just thinking so much of you



계절이 한 번 더 바뀐 후

어렵사리 수지를 다시 만나 그때의 일을 간접적으로 해명했는데

작금에 생각해도 찌질하기 그지없었지

학생식당에서 그녀에게 때늦은 생일선물(낙하산 타는 고릴라 인형과 에어서플라이의 <I can wait forever> 음반)을 주면서 말했어

ㅡ야, 수지야

ㅡ응?

ㅡ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너랑 생일이 똑같은 여자가 있어

ㅡ그래?

ㅡ응. 누구냐면…아, 작년에 내가 자전거 타다가 너를 우연히(우연은 개뿔…) 만난 적 있잖아. 기억나?

ㅡ그랬어?

ㅡ그래. 그때 왜, 자전거 뒤에 타고 있던 어떤 '누나' 있었잖아. 우리 동아리 '선배님'인데, 그 '누나'가 너랑 생일이 똑같아. 신기하지? 그치?

찌질남은 이렇게 자존심도 지키고 자승자박 누명(?)도 벗었다고 생각… 아니, 착각했지.


그리고 생일이 똑같다는 건 100퍼 팩트야

지금까지도 그녀들의 생일이 며칠인지 기억하고 있거든

수지를 너무나도 연모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날짜의 단순함 때문인지 잘 모르겠어

바보라도 기억할 숫자의 배열이거든


0123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 나오는 한 구절을 패러디해 본다

ㅡ한때는 아픔이요 시련이었으되 이제는 다만 이불킥일 뿐인, 아, 찌질한 우리 젊은 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갑이 아닌 을로 존재했다. 영화음악으로 말하자면 메인테마가 아닌 배경음악으로.


휴대전화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나는 집에 있는 전화기 근처를 떠날 수가 없었다. 잠깐 슈퍼마켓에 다녀오는 동안에 수지의 전화가 오면 어떡하지? 화장실에서 똥 싸는 동안 전화가 오면 어떡하지? 중간에 대충 끊고 달려가야 하나? 아마도 마초맨 근식이라면 이렇게 갈궜겠지. 에라, 이 등신아....

그러다가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 나는 우사인 볼트가 되어 전광석화의 동작으로 수화기를 낚아채듯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선거에 기호 1번 김복남을 찍어주시면...."

ㅆ발...


따르릉 소리

전화를 들면

들려오는 그대 목소리

보고픈 마음 가눌 수 없어

큰맘 먹고 전화했대요


유재하의 노랫말처럼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수지가 어쩌다 내게 전화할 때는 '큰 맘'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여하튼 당시에 전화벨 소리는 내게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 그녀의 닭똥 같은 눈물을 처연하게 바라보던 그날ㅡ배경음악으로 전락했던 그날에 비로소 그것이 썩은 동아줄임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제는 전화 벨소리가 울리면 경험으로 대개 광고 전화라는 것을 안다. 한 번은 모 인터넷 회사 광고가 하루에 서너 차례 온 적도 있어서 수신 거부를 했으나 뒷자리 번호가 바뀐 채로 계속 걸려오는 통에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한 적도 있다.

요즘도 070 번호로 계속해서 광고 전화가 걸려 온다. 물론 안 받는다. 이제는 발신인을 확인하는 일조차 귀찮다.


한때는 전화 벨소리를 케미컬 브라더스의 <Block Rocking` Beats>로 설정해 놓은 적이 있다. 젊은 시절에 무진장 좋아했던 음악이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했던 이 음악이 벨소리로 사용된 이후로는 점차 싫어지는 거다. 이 곡의 드럼 소리만 들려오면 조건반사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물론 그놈의 빌어먹을 광고 전화 때문이다. 아마도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벨 소리로 지정해 놓았다면 운명 교향곡뿐만 아니라 베토벤도 저주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좋아하는 음악을 벨소리로 지정하지는 않는다.


휴대전화가 없었던 시절의 벨소리는 천상의 음악이었고 가뭄의 단비였다.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적막한 날에는 내 집이 마치 유배지 같았다. 지금은 유유자적의 평화를 깨는 망치가 되어버렸다.

광고 전화는 현대사회에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렇다면 전화 벨소리를 짜증이 아닌 반가움의 신호로 변모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석원의 수필,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다시 읽다가 깊은 공감을 받는다. 그에게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사랑해'도 아니고 '저 자취해요'나 '라면 먹을래요?'도 아니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바로 '뭐해요?'다.


뭐해요?


전화 벨소리를 '뭐해요?'로 대체하게 된다면, 과연 나는 이 소리마저 싫어하게 될까?

문득 호아퀸 피닉스 주연의 영화 <Her>가 생각난다. AI 그녀는 <카바티나>를 연주해 주어도 쓸데없이 울지 않을 것이고 '만나면 뭐 하니, 그냥 전화하면 됐지' 따위의 허튼소리도 안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내게 물을 것이다.


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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