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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타란티노

ㅡ인지부조화에 대하여

by 지얼



이틀 동안 그동안 못 보았던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세 편을 몰아봤다.

<헤이트풀 8>, <장고 : 분노의 추격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한 줄 평은 이렇다.


무자비한 타란티노


타란티노는 여자라고 봐주는 거 없다. 남자든 여자든 나쁜 놈이면 목매달아 죽이든 눈깔을 뽑아 죽이든 태워 죽이든 인정사정없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어떤 대사를 보니 타란티노는 허식과 위선을 특히 싫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 히피 여성이 브래드 피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배우는 가짜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쓴 대사만 말할 뿐이니까요. 멍청하게 TV에서 죽이는 흉내만 내는데 그동안 베트남에서는 실제로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잖아요."

음, 그렇지. 베트남에서의 슬픔을 잊기 위해 니들은 마약과 그룹섹X를 할 수밖에 없었겠지.


게다가 찰스 맨슨의 똘만이 히피들은 영화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에게 살인을 가르쳤다며 자신들이 영화배우를 살해하려는 것을 정당화한다. 무자비한, 그러나 영화를 너무나 사랑하는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들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적 응징을 내린다. 실제로 살해당한 샤론 테이트에 대한 복수를 하듯이. 개로 하여금 소중이를 물어뜯게 하고, 수차례 기물로 안면 강타하고, 불로 구워버리고.....

찰스 맨슨의 똘만이에 비하면, 데이빗 핀처 감독의 <파이트 클럽>에 등장하는 길거리 싸움꾼들은 얼마나 순수한가. 적어도 걔들은 자신들의 그림자-폭력성에 토를 달거나 이유를 찾지 않으니까.


https://youtu.be/DtsKrlTkDSA?si=xKexLbq8u25CS12G



일본의 코미디언,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가 이탈리아의 한 영화제에서 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을 했다고 한다.

"세계 인구의 몇 분의 일은 오늘 저녁을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아남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텐데, 영화나 찍고 게다가 이런 상까지 받다니 나는 정말 엄청나게 행복한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소나티네>나 <하나비> 같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미친놈. 맘에 그렇게 걸렸으면 애초에 수상을 거부하든가.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자살한 이유는, 소위 인디 문화의 주역-펑크 로커로서 메인 스트림의 꼭대기에 올라선 것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라는데, 솔까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네버마인드>와 <인 유테로> 음반이 빌보드 1위에 등극했을 때 엄청 괴로워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애초에 왜 메인스트림 회사인 게 펜레코드로 소속사를 옮긴 걸까?


비틀스의 존 레넌도 마찬가지다. 그는 <Imagine>이라는 노래를 통해 마치 소유란 것이 없으면 세계 평화가 올 것처럼 노래했지만 기실 70년대 후반에 그의 재산은 천억 원에 가까웠다. 무소유를 장려하는 풀소유의 혜민스님보다는 욕을 덜 처먹었던 것 같긴 하지만.


한 번은 70년대의 젊은이들이 통금을 어겨가면서까지 소위 '나이트클럽'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는 모습의 빛바랜 영상들을 접한 적이 있다. 그것에 대해 한 저명한 문화평론가가 70년대의 군사 독재 정권의 억압 아래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젊은이들이 춤에서 해방을 찾고자 하는 일종의 저항 정신 운운하는데, 한석규 세종대왕 님처럼 한마디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마약을 하는 것도, 새벽까지 춤을 추는 것도 물론 다 일그러진 세상 탓이지. 와, 이렇게 빈정거리니까 꼰대 셀프 인증을 하는 것 같다.

혹자는 이런 식의 인지부조화에 대해 '스테이크를 먹으며 자살을 예찬하는 쇼펜하우어'라는 말로 빈정거리곤 한다(내가 알기로는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 자였을지언정 자살을 예찬한 적은 없다). 다만 다음의 생각이 아예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지부조화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닝겐이 존재할까?


나의 책장에는 <동물해방>이나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 같은 책이 꽂혀있지만, 냉장고에 <원할머니 족발/보쌈>이나 <BBQ 치킨> 따위의 종이 자석 전단지도 붙어있다. 간혹 지구 온난화와 대기 오염에 대해 말하지만 나는 나의 경유차를 팔아 치우지 못하고 있다.

빌 머레이와 스칼렛 요한슨의 나이 차이 때문에 2004년 작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거의 몰입을 못하지만, 정작 작금의 내가 그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스칼렛 요한슨 때문이다.



https://youtu.be/Uahe2LJwVcY?si=3M0xRqCi_A6EzjRK

Camel <Long goodb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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