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타율적 강제에 대하여
백모와 주름살 따위는 있으래야 있을 수가 없었던 뽀송뽀송한 대딩 시절,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봄날의 축제 중 스쿨밴드의 공연을 봤을 때
뿅 갔다
드럼 연주? 알게 뭐냐.
기타 실력? 아웃오브안중.
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보컬이었다.
Four non blonze의 <What`s up>을 멋지게 불렀던 이름 모를 그녀.
편의상 '수지'라고 하자.
청바지 차림에 단발머리를 한 수지를 비교적 근거리에서 볼 기회가 생겼다. 학교 인근 지하 카페에서다. 음해선생(내 친구의 별명)과 나는... 아니, 음해선생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소 심쿵하였다. 수지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그날 이후로 나의 이상형은 이렇게 재조정되었다.
단발머리에 청바지 차림의, 담배도 잘 피우고 노래도 잘하는 여자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저... 안녕하세요."
"...."
"처음 뵙겠습니.... 아니, 실은 저번에 축제 공연 때 봤습니다."
"아, 네..."
"노래를 정말 잘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네?"
"제가 밴드 보컬을 구인중인데... 저희 밴드 보컬로 모시고 싶습니다."
"네.... 근데 저는 지금 하고 있는 밴드가 있어서..."
"거긴 그냥 탈퇴하시고 저희랑 함께 하시죠. 저희 연주를 들으면 놀랄 겁니다."
"그런가요?"
"곡은 보컬 분께서 지정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당장 하기에는 좀..."
"시간 되시면 지금 저랑 같이 가시죠. 저희 연습실을 보여드리겠습니다"하고 접근한 후 즐거운 밴드 생활로 대딩 시절을 수놓았......
.....어야 했거늘, 장밋빛 미래에의 기대는 항시 현재의 까임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낚싯대는 거두어진다. 더군다나 당시의 나는 미끼(밴드와 연습실, 그리고 전기기타)도 없었다.
짐 카니 감독의 영화, <싱 스트리트>의 주인공이 생각난다. 주인공 '코너'는 점찍어둔 여학생 '라피나'에게 작업을 거는 도중에 잘 보이려는 심산에서 '밴드를 하고 있다'며 개뻥을 친다. 하지만 그 직후에 코너는 진짜로 밴드를 결성한다. 사랑하는 라피나에게 구라나 치는 한심한 남자로 남기는 싫었으므로.
영화에서는 여지를 남기지만, 아마도 그는 롹스타가 될 것이다.
https://youtu.be/2rZPsLvTD-g?si=0EScYJYm6OkqBqOK
생각보다 이런 인간들이 좀 있다.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에 다음의 장면이 나온다.
첼로를 연주하는 부잣집 영양 '세경'을 사랑하게 된 '이찬' 군. 그녀의 화려한 배경에 주눅이 들어 음악 하는 선배 '발산'에게 울먹이며 하소연을 하기 시작한다. "저는... 가진 게.... 흑흑... 너무 없습니다..."
선배 발산이 대답한다. "그럼 밴드를 해야 해! 밴드맨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어. 커트 코베인 형님이 증명을 하셨잖니."
이찬 군이 묻는다. "그게 누군데요?"
"있어, 그런 분이.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이 세계를 정복하고 미인을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찬 군의 눈빛이 반짝인다. "밴드맨이 되는 것이야!"
하지만 현실은 이랬다. 밴드 음악을 좋아하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대해 세경이 대답하기를, "좋아하긴. 소음 공해지." 하지만 이 사실을 알리가 없는 이찬 군은 그렇게 스쿨밴드의 보컬리스트가 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코너나 이찬 군은 100% 순수한 '자유의지'로 음악을 하게 된 것일까? 아마도 스피노자 선생이라면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하셨을 테다.
https://youtu.be/i4ZOqvbU29M?si=q5ubZeMtpqoUTm-a
'술을 끊지 못해 고민입니다'라는 고민을 토로한 한 젊은이에게 법륜스님은 단칼에 이렇게 처방을 내린다. "끊으면 되지." 하지만 금주가 어렵다고 토로하는 청년.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답변한다. "그럼 계속 마시면 되지."
스님의 답변은 아마도 이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거다. "그가 그 일을 못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실 그는 그것을 하기 싫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선생의 말이란다.
한 번은 어떤 지인이 독서를 하고 싶은데 직장 때문에 할 수가 없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하지만 퇴근 후 그는 여전히 친구와 술을 마시고, 혼자 있는 시간에는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본다. 나는 위의 견해에 대해 다음의 견해를 추가하고 싶다. "그가 그 일을 못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실 그는 '그것'보다 '저것'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몇 년 동안의 출강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 있다. 한 클래스의 학생 수가 10명이라고 할 때 교육이 끝나는 학기말에는 다음과 같이 결판이 난다. 기타를 배운 것만큼 숙지한 학생은 두 명 남짓이고,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이들이 세 명 남짓이다. 나머지 50%? 그냥 전멸.
예컨대 학기 초에 가르친 G코드 폼을 학기말에서도 숙지를 못하는 거다. 왜 그럴까? 물론 개인적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는 너튜브의 짤처럼 기타보다 재미있는 것이 널려있기 때문에. 기타 연주의 즐거움은 그것이 익숙해지는 먼 훗날이겠지만 너튜브의 짤은 지금 당장 재미있다. 이것은 미래의 큰 보상 보다는 즉각적인 보상을 선호한다는 '과도한 가치 폄하'라는 인지 편향의 문제다.
인간의 행동에 가장 치명적인 오류를 초래하는 본성의 특징은 무엇이건 가까이 있는 것을 멀리 있는 것보다 선호하도록 하고, 우리가 대상을 그 내재적 가치보다 그것이 처한 위치나 상황에 따라 욕망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이러한 판단으로 행동을 조율하지 않고 정념의 유혹에 굴복한다. 정념은 무엇이건 옆에 있는 것을 선호하도록 유도한다.
ㅡ데이비드 흄
사람들이 독서를 왜 안 하냐고? 그야 독서보다 당장 재미있는 게 널려있으니까. 재미에 불 붙는 속도는 너튜브의 짤이나 게임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 누군가 내게 '그러는 너는?'하고 묻는다면, 나 역시 이렇게 답변할 수밖에 없다. '똥 싸러 갈 때 책 대신 스마트폰을 가지고 들어간다'라고.
자유의지라는 것을 과대평가하면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바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아크라시아(의지박약)'라는 것은 미래의 이익보다 현재의 쾌락이 의지를 압도하는 데서 기인'한다. 클래식기타의 거장 안드레스세고비아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좋은 연주자가 드문 이유는 사람들 대개가 침대와의 싸움에서 지기 때문"이라고. 연습의 효과는 지연되어 있고 숙면에의 유혹은 당장 눈앞에 있다.
배고파 죽겠는데 눈앞의 치킨을 저녁의 뷔페 때문에 마다할 강철 의지의 인간이 있기는 한 걸까? 남자라면 그 누구도 눈앞의 장원영을 이길 수는 없다(성소수자 제외). 자유의지란 실상 허약하기 짝이 없고, 타율적 강제는 그보다는 강하다. 남자들이 K대(군대) 시절에 40km의 거리를 걸을 수 있는 것도 소대장의 발길질이 무서워서다. 자율보다는 타율이 차라리 쉽거나, 유능하다.
고로 의지박약의 내가 뭔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려면 자유의지에 기대지 말고 그것을 타율적인 환경으로 조장해야 한다. 운동을 하고 싶은데 잘 안 된다고? 그러면 일 년 치 헬스장 등록비를 선불하든지 과체중을 혐오하는 여성을 짝사랑하라. 본전 생각에, 또는 까임의 공포 때문에 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밴드를 할까 말까 고민 중이라고? 그러면 짝사랑하는 그녀에게 '밴드를 하고 있다'라고 개뻥을 쳐라. 그러면 밴드는 결성될 것이다. 금연하고 싶다고? 그러면 <금연회사>에 가입을 해라. 네가 몰래 담배를 피우는 순간에 금연회사 직원이 불현듯 나타나서 너의 손가락을 잘라버릴.... 아, 이건 좀 아닌가.
어쨌거나 나는 이를 일러
자발적 족쇄
라고 칭하고 싶다.
자발적 족쇄는 타율적 행위를 유도한다. 퇴근 후 기타를 연습하고 싶다고? 그러면 지인들과 연주회를 기획해라.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게. 책을 읽고 싶다고? 그러면 독서 모임에 가입을 해라. 한 달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으면 퇴출되는(하지만 장원영에 필적하는 외모의 여성이 있는) 모임이면 더욱 좋다.
외모가 장원영 급인 여성과 사귀고 싶다고? 그러면 과감하게,
걍 포기해라
타율적 강제도 한계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