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형성한 법칙

ㅡ신에 대한 전쟁

by 지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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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씨는 새를 아주 좋아해서 마당에 설치해 놓은 새장 안에 나름 예쁜 새들을 몇 마리 키웠단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새가 한 마리씩 사라지길래 알아보니 도둑고양이 소행이었다고.

새를 좋아하는 A 씨는 그 고양이를 잡기 위해 덫을 놓았고, 계획대로 포획되었다고 한다.

그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냐고?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련다.

그 고양이는....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고 밖에는.


쓰고 보니 웃긴 얘기다. 죗값이라니?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새 애호가의 입장이다. 자신의 소유물, 혹은 사랑하는 대상을 죽이는 존재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척결 대상 1호다. 예컨대 내가 햄스터 한 마리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고 해 보자. 그런데 어느 날, 옆집의 고양이가 내 햄스터를 물어 가버리고는 재미로 갖고 놀다가 죽였다. 나로서는 이 고양이가 <주라기 공원>에 나오는 티라노사우르스처럼 생각되지 않겠는가? 살처분 대상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도둑고양이를 잔인하게 처단했다는 얘기에 마냥 마음이 편하지 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집사이니까.

물론 이렇게 논리적(?)으로 항의할 수도 있다.

"고양이가 새를 잡아먹는 것은 자연법칙입니다. 그걸 그렇게 꼭 죽이셔야 했습니까?"

하지만 쓸데없는 항의다. 왜냐하면 A 씨는 이렇게 항변할 수 있으니까.

"내가 아끼는 새를 죽이는 존재를 내가 죽이는 것도 자연법칙입니다. 사자가 자신의 새끼를 죽이려 들거나, 자신의 음식을 뺏어 먹으려는 하이에나를 죽인다고 한들, 그게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한, 인간은 나처럼 감정적 편향의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오래전에 이런 기사가 인터넷 신문에 기재되었다.

지하철 역에서 생활하는 노숙자 B 씨가 동료 노숙자 D 씨를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살해 이유는 이렇다. B 씨는 잠시 다녀갈 곳이 있어서 자신의 반려견을 잠시 D 씨에게 맡겼단다. 하지만 D 씨는 너무나 배가 고팠는지, 아니면 고기 생각이 간절했는지 이 강아지를 잡아먹고 만 거다. 사실을 알게 된 B 씨는 너무나 화가 나서 D 씨를 살해해 버린 것이다.

글쎄다. 이것이 어디까지 정당한 행위가 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일단 두 상황을 대비해 보자.


식구나 다름없는 반려견을 죽인 사람을 죽이는 것은 법적으로는 문제가 있더라도 능히 이해할 만하다

VS

식구 같은 반려견을 잡아먹었기로서니, 사람을 죽이는 일은 도가 지나친 일이므로 이해의 여지가 없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어린 시절에 네로와 파트라슈의 우정을 감동 깊게 바라본 나로서는 당연히 전자다.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의 판단은 지극히 감정적이라는 것을.

고로 나 같은 인간은 판사를 하면 안 된다.


스크린샷 2024-12-27 오전 1.24.10.png 영화 <존 윅>의 한 장면


고양이가 오늘도 또 새를 잡아왔다.

이제까지 잡아 온 것의 수가 대충 삼십 여 마리. 먹지도 않을 것을 잡아오는 것이다.

혹자는 이를 '고양이의 보은'이라고, 다시 말해 매일 먹을거리를 주는 주인... 아니, 집사에 대한 보은이라고 하지만 내가 모시는 냐옹대군께서는 본능의 해소를 위해 그저 재미로 잡아오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 먹으라고 갖다 준 음식(?)을 입에 물고 흔들거나 발로 몇 차례나 걷어찰 이유는 없을 테니까.


언젠가 어느 책에서 다음의 질문을 접한 적이 있다.

"구명보트에 한 사람과 한 마리의 리트리버 강아지가 있다. 그런데 이 보트는 일인용이다. 둘 중 누가 보트에서 내려야 하는가?"
물론 리트리버다. 우리의 이성적 사고는 이렇게 판단한다. 하지만 질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사람에 두 마리의 리트리버라면? 그래도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세 마리라면? 더 나아가 백, 아니 천 마리라면?
이 질문의 요지는 이렇다. 한 명의 인간 생명은 대체 몇 마리의 리트리버 생명과 등가교환이 가능한가? 한 명의 인간을 구하기 위해 백 마리, 아니 천 마리의 리트리버를 죽이는 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한가?

영화 <존 윅>에서, 은퇴한 킬러 존 윅(키아누 리브스 분)은 자신의 와이프가 생전에 남긴 비글 강아지가 무장 괴한들에 의해 무참히 죽자, 복수의 칼을 갈고 결국 마피아 조직원 전부를 몰살시킨다. 존 윅이라면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개 한 마리의 목숨값이 (비록 마피아라고 하더라도) 인간 여러 명의 목숨 값에 갈음하겠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이런 질문에 답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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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옹대군께서 갖고 노는 중에 이리저리 찢겨 죽은 참새를 인근 땅에 묻어주었다. 새든, 생쥐이든, 생명체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짓만은 삼가자고 생각한 탓이다. 오래전에 쥐잡이용 끈끈이에 들러붙은 쥐 한 마리를 쓰레기 봉지에 담아 버린 이후로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해 온 터였다.

물론 이런 것에 도덕적 지탄의 근거는 없다. 구태여 있다고 한다면 환경미화원 분들에 대한 배려 부족 정도일까?

이것은 다만 감정의 문제일 뿐이다.


가엾은 참새를 보며 생각한다.

내가 저 고양이를 거둔 대가로 대체 몇 마리의 새가 앞으로 계속 죽어야만 하는가? 차라리 저 놈을 없애버리는 게 공리주의적 차원에서 유익이 아닐까?
물론 바보 같은 생각이다. (예쁜) 얼룩말의 생존을 위해 (흉악한) 악어를 몰살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이라는 핵심적인 법칙이 지배하는 자연의 세계에서, 답도 없는 윤리철학으로 머리를 싸매는 인간이란 종은 얼마나 변태적인가.


그럼에도 종종 악어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장면을 영상을 통해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삼겹살과 족발의 맛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애초에 신께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초식동물로 창조하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나'의 생존을 위해 타 존재를 죽여야 한다는 자연법칙 그 어디에 '사랑'이 있는 걸까?

아마도 구약성격에 등장하는 이사야 선지자도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메시아가 오시는 날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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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빌어 이렇게 썼다.

"....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만든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란다. 사랑은 잘못된 설계 원칙의 산물인 혈통이 나쁜 생명체도 인정하는 것이야."


그래서 나는 악어를 인정하듯이 혈통이 나쁜 고양이도 인정하기로 했다.

".... 우리가 우리에게 혹은 무엇에게 베푸는 모든 친절한 행동들은 우리를 형성한 법칙의 정신에 도전하는 것이야. 악보다 선을 더 중시한다면 우리를 형성한 법칙에 도전하는 것이지.(...) 법칙을 거부하는 것은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오직 거부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단다."


그래서 나는 자연법칙에 거부하여 한 짐승의 집사가 되었다.

아니, 이 말은 틀렸다. 내가 진정으로 자연법칙을 거부하고자 한다면 오늘 먹은 삼겹살은 다 게워내고 비건 선언을 해야만 한다. 내가 냐옹대군의 집사가 된 것은 자연법칙에 반하려는 의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적 애호의 문제일 뿐이다. 인간은 각기 제멋대로 동물을 먹거나, 사랑하거나, 혐오하니까.

끝으로, 동의하거나 말거나 마크 롤랜즈는 결정적인 말 한마디를 던진다.


"정말로 우리를 만든 신이 있다면 모든 사랑은 그 신에 대한 전쟁일 거야."






사족 :

군대 시절, 나의 군홧발에 밟혀 죽은 생쥐 한 마리와 뱀 한 마리를 추모하며.

ㅡ정당방위의 차원이 아닌 한, 살아생전에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



https://youtu.be/4KBYQcXuMsA?si=PcYPjx5cTfW7drQ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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