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Acrostic poem
진중권 작가의 저서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 '아크로스틱(acrostic)'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어로 '아크로스(acros)'는 '맨 앞', 스티코스(stichos)는 '어구'를 의미한다고 한다. 진중권 작가의 말에 의하면 '아크로스틱'은 어구의 맨 앞을 따서 새로운 어구를 만드는 놀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삼행시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유튜브 채널 <드립팩토리>에서 소개한 '막장 삼행시'들 중 두 개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인덕원 3행시 :
인 : 인간과 인간이 만나
덕 : 덕을 쌓는 것을
원 : 원나잇이라고 한다
서울대 3행시 :
서 : 서럽게 울고 있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죠
울 : 울지 말고 나랑
대 : 대실 하러 갈래?
<드립팩토리>의 장유환과 연예림은 가히 천재라 할 만하다.
이런 것도 있다.
가로 세로 삼행시 :
개똥아
똥싸니
아니오
가로로 읽어도 개똥아 똥싸니 아니오,
세로로 읽어도 개똥아 똥싸니 아니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음계 '도레미파솔라시도'도 아크로스틱의 소산이라고 한다.
도화지
레몬
미나리
파랑새
솔방울...
....뭐 이딴 걸 말하는 건 아니고, 중세의 그레고리오 성가 중 <요한 찬미가>에 나오는 낱말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 도리아 선법에 따라 이 곡의 멜로디는 도, 레, 미, 파, 솔, 라로 상승한다. 그에 따라 가사의 첫음절은 정확히 그 계이름에 해당되는 음높이를 갖는다. '도' 대신에 '우트'가 사용된 것은 당시에 아직 '도'라는 명칭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트'가 발음하기 쉬운 '도'로 대치되는 것은 17세기의 일로, 'Do'는 주님(Dominus)이라는 말의 앞 음절을 땄다고 한다.
Ut queant laxis 당신의 종들이
Resonare fibris 자유로이 찬양할 수 있도록
Mira gestorum 기적을 행하시는
Famuli tuorum 당신의 역사로서
Solve polluti 정결케 하소서 모든 흠결을
Labiinreatum 그들의 더러운 입술로부터
Sancte Joannes 성 요한이시여
물론 이는 엄밀한 의미의 아크로스틱이 아니다. 당시에는 아직 계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수도사 귀도 다레초(Guido d`Arezzo, 995~1050)가 처음으로 저 가사의 음절을 따서 음의 이름으로 사용했고, 성가대의 연습을 위한 이 관행이 나중에 계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계이름을 이용한 아크로스틱이 등장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ㅡ진중권,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중에서
며칠 전, 맥주 안주를 위해 소시지 야채 볶음을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뭐지? 이 허전한 맛은?
뭔가 빠져 있다.
기억의 회로를 돌린다.
수년 전에 자취 경력 10년의 후배들이 가르쳐 준 레시피를 기억해 본다.
후배 명석 군의 가르침에 기반하여 또다시 시도해 본다.
이번에는 칼집도 더 무자비하게 냈을뿐더러 또 다른 후배 성호 군의 다소 복잡한 레시피(야채+소시지+케첩+고추장+후추+깨소금)도 참고한다.
맛을 보니 좀 짜다. 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었나 보다.
어쨌거나 소시지 야채 볶음의 레시피로 인도해 준 명석 군과 성호 군에게 감사의 의미로 자작시(acrostic poem) 한 편을 헌정한다.
제목 : 선술집에서
명륜동의 가을을 기억하네
석양의, 타다 만 달갈 같은 검붉은 빛
아직 청춘이 끝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성난 파리떼처럼
호기롭게 거리를 질주하던
가없을 것 같은 청춘의 정신착란
야시장 뒷골목 선술집의
동동주에 취해
보상 없는 이별과
여한 가득한 회한을
달콤하고 매운 닭발처럼 음미하며
라이터 불에 그을리다 만
고색창연한 너의 사진을 바라본다
툭하고 고개가 떨어진다
하찮은 우리의 인연은 불어 터진
면발처럼 역겨웠나니
졸음 쏟아지는
라디오의 주파수 소음이 지글거리는 선술집에서
사족 :
위의 인용글 "도리아 선법에 따라 이 곡의 멜로디는 도,레,미,파,솔,라로 상승한다"에서, 도 음부터 상승하는 것은 내가 알기로 도리안 모드가 아니다(도리안 모드라면 도,레,미b,파,솔,라,시로 진행되어야 한다). 아마도 저자의 착각인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