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불행

ㅡ마이너스 인생

by 지얼


기타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다음 중 어느 경우가 더 가르치기 어려울까?

1) 자세는 나쁘지만, 3년 정도 독학을 한 학생

2) 처음 배우는 학생


내 경험상 무조건 1번이다.

1번의 경우 독학을 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세가 나쁘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이 말인즉, 자세 좋은 독학자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3년, 또는 그 이상 독학을 한 학생 분들이 나를 찾아오는 이유는 분명하다. 현재 자신이 연습하는 곡의 어디선가 자꾸 막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

"제가 음악성이 없어서요...."

나는 이 말이 그저 의례적인 겸손이라고 믿는다.

만일 겸손이 아니라 정말로 음악성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자 더 나쁘게는 책임 전가다. 그것도 소위 '조상 겐세이'가 되니까.


20대 시절에 당구를 칠 때, 타격을 위한 어떤 특정 자세를 취할 때 다리가 짧아 두 다리가 지면에서 떨어지게 되는(이것은 규칙 위반이다) 친구들은 그럴 때마다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에이, 씨. 조상 겐세이..."

'겐세이'라는 말은 일본어로 '견제'라는 뜻인데 보통은 상대방이 내 플레이를 지능적으로 방해, 혹은 견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상 겐세이'라는 말은 조상이 내게 짧은 다리를 물려주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는 의미일 테다.

구태여 지적하자면, 음악성이 없어서 그렇다는 이유는 결국 조상이 자신에게 음악성을 내려주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조상 탓인 거다.

물론 대개의 경우 '음악성이 없다'는 말은 심사숙고의 결과로 나온 말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별 생각 없이 말을 내뱉기 십상이니까.


나는 확신한다. 그래서 이렇게 조언해 준다.

"당신이 그 부분이 잘 안 되는 것은 (조상을 잘못 둔 탓이나) 음악성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릇된 자세가 고착화되어버린 탓에, 연주 동작에 있어서 물리적인 불합리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대개의 경우 음악성이 문제가 아니라 자세, 즉 운동성(?)의 문제인 것이다.


그릇된 자세가 고착화될 경우, 문제는 이것을 고치기가 꽤나 어렵다는 거다. 작가 글렌 커츠가 언급했듯이, 우리의 몸이 고집스럽게 저항을 하기 때문에.


내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손의 잘못이 아니다. 내 손가락들은 내가 훈련한 대로 연주한다. 지금 모습은 언제나 연주를 하는 그 모습 그대로다. 흔히들 몸이 기억한다고 하는데, 몸이 익힌 테크닉은 믿음직하지만 동시에 변화에 고집스럽게 저항한다.(...) 일시적인 실수를 바로잡기란 쉽다. 하지만 테크닉을 교정하려면 지금까지 해 온 연습을 싹 다 지워버려야 한다. 원래의 습관을 새로운, 다시 말해 더 좋은 습관으로 교체해야 한다.

ㅡ글렌 커츠, <다시 연습이다> 중에서


잘못된 독학자의 자세를 교정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도화지에 그가 그린 잘못된 그림들을 일단 깡그리 지워야 하는 것과 같다. 다 지운 후에 일단 백지상태로 만들어야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0의 상태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상태에서 제로를 향해 출발해야 하는 거다.

이것이 차라리 초심자를 가르치기가 더 쉬운 이유다. 초심자의 근육은 독학자의 그것보다는 저항이 훨씬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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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4층에 위치한 헬스장에 가기 위해 1층의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순간, 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와 있다.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이 얼마나 소소한 행운인가. 반대로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위치할 때는 이런 생각이 든다. '중간층에서 사람들의 탑승으로 인한 시간의 지연까지 계산하면, 대체 저 꼭대기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언제쯤 지상에 도달할 것인가. 오늘은 운이 없군.' 이런 생각도 든다. 4,50층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면 기다림, 혹은 참을성의 대가들 아닐까?


모든 인문학 서적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작은 것에 만족하라'는 것. 작고 소소한 일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말인데, 말은 쉽지 그게 잘 안 된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작고 소소한 일에서 행복을 찾기 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작고 소소한 일에 불평하지 않는 습관이 아닐까, 하는.

불평하지 않는다는 것은 백지상태의 도화지와 같다. 반면에 사소한 것에 불평을 일삼는 것은 이미 더럽혀진 도화지와 같다. 후자의 경우 마이너스 상태인 거다. 일단 이 마이너스의 태도를 0으로 돌려놓아야 플러스 상태로 나아갈 것이 아닌가? 불평하지 않는 습관이 몸에 배어 말을 듣지 않는 근육처럼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소소한 것에 만족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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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를 지나가기 직전의 심리는 대개 이렇다.

오... 제발.

파란불의 지속을 염원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러하듯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초록색 불이 주황색 불로 바뀌는 순간 나는 소소한 불행을 경험한다. 이 지경일진대, 만일 앞 차가 그대로 통과할 수도 있었을 상황에서 정지해 버리는 탓에 나까지 정지해야 했다면? 이때는 내 소소한 불행의 원인을 앞 차의 운전자에게 돌린다. 야, 이 개자식아! 너 때문에 내 소중한 시간이.... 씨부렁씨부렁 구시렁구시렁.


만일 그 상황에서 때마침 감기로 인해 코에서 콧물이 줄줄 흐르게 되었다고 치자. 한 손으로 코를 풀 수는 없는 노릇이니, 계속 운전중일 때는 코를 풀 방법이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는 앞 차가 정지해 준 것이 차라리 고맙게 여겨지지 않았을까? 그때는 시원하게 코를 푼 뒤, 소소한 행복과 감사를 느꼈을까?

마이너스는 일단 제로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소한 행복은 소소한 불평으로 모조리 상쇄된다. 아니, 그전에 소소한 것에 불평이 많은 인간이 소소한 것에 행복을 느낄 수가 있을까?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지뢰밭'인 인간에게?

고로, 나는


행복해질 수 없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 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들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ㅡ김 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전문




스크린샷 2024-12-30 오후 2.15.32.png 고 김수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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