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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과 주관

ㅡ객관은 어떻게 공허해지는가?

by 지얼


주관적 진실과 객관적 진실의 차이는 원자핵과 전자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이과 출신들은 안다. 축구공 만한 원자핵이 잠실운동장 한가운데 있다면 전자는 운동장 너머에 있다는 것을.

이런저런 모임의 회식 중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간혹 이런 질문이 내게 향하곤 한다.


ㅡ선생님은 연애 안 하세요?


이 경우 나의 답변은 한결같다.


ㅡ뽕을 따고 싶어도 님이 없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대개 이렇다.


ㅡ얼른 결혼하셔서 아이도 가지셔야죠.


내 대답도 항상 똑같다.


ㅡ씨를 뿌릴 밭이 없습니다.


(이 모임에 내 친구들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그들이라면 아마 이랬을 테다. "밭이 있어도 씨가 안 뿌려지겠지." 능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이어지는 대화.


ㅡ왜요? 학원생들 중에 괜찮은 여자 없어요?

ㅡ거의 없지만 있어봤자 그림의 떡이고 못 먹는 감입니다.

ㅡ왜요?

ㅡ유부 아니면 젊은 처자들이거든요.

ㅡ유부는 좀 그렇고... 그럼 젊은 애들 중에서 맘에 드시는 분이랑 사귀면 되잖아요?

ㅡ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어떻게 사귑니까?

ㅡ에이, 사랑에 어디 국경과 나이가 있나요. 좋으면 그만이지.


사랑에 나이와 국경은 없다는 것, 이것은 <객관적 진실>이다. 대화는 내가 질문을 던짐으로써 계속 이어진다.


ㅡ그럼 길순(가명)님께서는 남녀 간 허용될 수 있는 나이의 차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나요?

ㅡ글쎄요.... 딱 꼬집어서 말하기에는 좀 모호하네요.

ㅡ예컨대 스무 살을 넘으면 안 된다거나, 아니면 띠동갑까지만 허용된다거나.

ㅡ흠... 질문이 넘 어려워요.

ㅡ그럼 상상력을 발휘해 보시면 됩니다. 만약에 길순 님의 따님인 미연(가명)양이 결혼할 사람이라며 남자를 데리고 왔는데 스무 살 차이라거나....


<주관적 진실>은 항상 주저함이 없다.


ㅡ절대 안 되죠! 사위랑 장모랑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면 곤란해요!

ㅡ그럼 열다섯 살 차이는요?

ㅡ그것도 좀 아닌 것 같아요.

ㅡ띠동갑은요?

ㅡ(잠시 망설이다) 그것도 좀.... 아니, 괜찮으려나? 아, 잘 모르겠어요...



스크린샷 2024-12-21 오후 12.38.45.png 삼촌과 조카 사이 아님....



가끔은 주관적 진실이 객관적 진실에 우선한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나라고 안 그러겠는가?

1976년의 이탈리아 영화 <라스트콘서트>에서의, 40대 초중반 남자와 열여덟, 혹은 열아홉 살 소녀와의 사랑은 일종의 뽠타지일 뿐이고 현실에서의 그 정도 나이 차이의 관계는 범죄라고 정죄받거나 로리타콤플렉스 취급 당하기 십상이다.

영화 <레옹>에서의 레옹과 마틸다?

영화는 영화일 뿐.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마흔세 살의 박동훈(이선균 분)은 과연 스무 살의 지안(아이유 분)을 여자로서 사랑한 것일까? 다수의 여성 분들이 휴머니즘의 일환으로 일축해 버리는 것을 혹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들 중 몇몇은 뽠타지를 통해 너그러운 객관적 진실을 앙망하곤 하지만 결국에는 측근의 리얼 현실에서 편협한 주관적 진실을 재확인할 뿐이다.

술기운이 돌고, 회식자리는 무르익는다.


ㅡ나중에 우리 딸이 결혼할 때 선생님이 축가를 연주해 주면 좋겠네요.

ㅡ<웨딩케잌>은 어떨까요? "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

ㅡ(웃으며) 그게 뭐예요.... 그런 거 말고 연주곡으로 해주세요.

ㅡ그럼 엘가의 <사랑의 인사>는 어떨까요?

ㅡ그거 좋아요. 그걸로 해주세요.

ㅡ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안 되겠네요.

ㅡ왜요?


진지하게 답변을 한다.


ㅡ자축하자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신랑이 자기 결혼식에 축가를 하는 경우는 없잖아요?


미래의 장모님(?)에게 팔뚝을 두세 대 얻어맞는다.


"앗! 왜 그러세요, 장모님!"


추가로 한 대를 더 처맞는다.

교훈을 얻는다.


[객관 없는 주관은 맹목적이고 주관 없는 객관은 공허하다.]


덧붙여 말하자면,

주관적 감정의 필터링을 통과하지 않은 객관적 진실이란 한갓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Q.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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