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마음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후략)
ㅡ박인환 <세월이 가면>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를 읽었을 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잊을 수 있지?
그래서 결론지었다. 박인환 시인은 시를 위해 겉멋을 부린 것이라고. 명사보다 감각의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시적 형용을 위해.
이제는 정치적 이견으로 인해 관심 밖의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작가 이문열은 한수산과 더불어 젊은 날의 내게 문장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사람이었다.
근래 이 분의 <사람의 아들>을 20세 때 읽은 후로 재독 했는데, 이틀 동안 완독을 한 것으로 보아 역시 소설적 재미를 아는 작가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내친김에 <젊은 날의 초상>도 재독 하는데... 문득 뒷장에 정체 모를 전번이 필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019 354 1172
그리고 여성이라 짐작되는 이름도.
유리
대체 누구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번에 두 줄이나 밑줄이 그어진 것으로 보아 예사로운 이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유리.
유리..
유리...
유리....
유리.....
유리......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정녕 시간의 파괴력 탓인 것일까, 아니면 유리라는 처자에게 대차게 까인 탓에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아 내 정신이 망각이라는 방어기제를 발동한 것인가.
혹은 영화 <이터널선샤인>의 주인공들처럼 기억제거회사에서 기억을 지워버린 것인가. 박인환 시인의 시처럼, 사랑했던 이의 이름이 잊히는 것이 정녕 가능하단 말인가.
언젠가 선릉역 근처의, 담벼락이 무진장 길고 대문 너머 잔디밭 마당이 펼쳐져 있고, 그 잔디밭 끝 계단을 지나 또다시 펼쳐진 잔디밭의 끝에 지어진 궁전 같은 집에 살고 있던 공주... 아니, 한 처자가 떠오른다. 언젠가 우리 집에 초대했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은 아직도 내 마음에 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어머, 집이 되게 서민적이다
‘사귄다’는 것의, 다소 헐거운 당시의 기준으로 따르자면, 나와 그녀는 사귄 게 맞다. 다만 그 기간이 너무나 짧았을 뿐.
작금에 그녀를 생각한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도 내 마음에 없다. 문득 1980년 노래, <옛 시인의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우리들의 사이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요.
아니, 남은 게 있다. 집이 되게 서민적이라던 말, 그리고 아반테는 쪽팔려서 못 타고 다닌다는 말.
당시의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이렇게 증명된다. 어떻게 사랑했던 이의 이름을 잊을 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전번에 밑줄을 쫙쫙 그어놓은 유리 또한 사랑했던 이는 아닐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남의 집 유리창을 깨뜨리는 통에 변상을 위해 누군가에게 급히 제공받은 유리집주인의 전번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두 겹의 밑줄을?
다음은 <젊은 날의 초상>의 한 구절.
[.. 그러나 어쩌랴. 그때 우리에게 삶은 다만 몽롱한 가능성이었고 사랑은 혼란과도 비슷한 하나의 추상이었음에.]
추상이었기 때문에 현실감이 사라져 망각되어 버린 그 누군가일까?
대체 유리가 누구야?
혹시....
우리 집더러 서민적이라고 했던....
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