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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 박제되는 경우

ㅡ15금 스토리

by 지얼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넷플릭스 신작 드라마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을 본다.

2화까지 봤다.
아, 더 이상 못 보겠다...

순수함을 유치뽕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노쇠함을 먼저 탓해야 할까?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는 순간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는데, 나는 드라마를 보는 순간 과거지사가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른다.

글타.

내게도 장난을 잘 치는 그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손예진 주연의 드라마 제목처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이기도 했다. 하여 내 추억의 대상은,


장난을잘치고밥잘사주는예쁜누나


가 되겠다.


때는 포장마차에서 곰장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의 가격이 2,3천 원 남짓하고, 당구장이 10분에 300원이고, 200원짜리 담배도 팔았고, 소주가 35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ㅡ아,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식민지 시대 얘기 같다ㅡ작금의 MZ들이 모유나 분유를 먹고 살거나, 아직 아빠의 정충으로 존재하던 시절이었을 거다.

벚꽃 잎이 낙하하고, 반대로 춘정은 약동을 하던 그 시절 어느 날에....


....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내 뺨은 장난을잘치고밥잘사주는예쁜누나 검지에 찔린다. 이러기를 수차례. 아마도 나는 알면서도 당해 준 것이리라.

한 번은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에 고개를 돌리는 척하다가...그대로 장난을잘치고밥잘사주는예쁜누나의 검지를 꽉 깨물어 버리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의 벤치에 앉아 낙화를 바라보며 봄의 기운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ㅡ마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오마샤리프가 저 멀리 사막의 지평선으로부터 주인공에게 점차 다가오는 롱테이크 장면처럼ㅡ장난을잘치고밥잘사주는예쁜누나가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어느덧 그녀가 내 1미터 앞까지 다가왔을 때.... 어머나, 세상에나, 장난을잘치고밥잘사주는예쁜누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 말도 없이 불현듯 등을 확 돌린 채 그대로 내 허벅지 위에 앉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때의 순간적인 내 심정은 드라마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의 남주와 동일했을 거다. 복수를 꿈꾸는...

지금이 기회다!


내 허벅지 위에 앉은 그녀의 등짝을 2초쯤 바라보다가, 나는 엄청 빠른 속도로 다리를 쫙 벌렸고ㅡ그리하여 그녀는 그대로 지면을 향해 하강을 하게 되었고ㅡ머잖아 엉덩방아를 찧게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글타. 넘 착했다. 장난에 장난으로 대응한 것이기는 하나, 여자에게 엉덩방아는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 거다. 물론 이런 생각은 그저 사후적 해석에 불과하다. 1초도 안 되는 그 낙하의 순간에 나의 행동은 상대를 보호하기 위한 반사적 행동이었을 테니.


나는 장난을잘치고밥잘사주는예쁜누나의 엉덩방아를 저지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백허그를 하듯이 붙잡으려 했는데 조금 덜 껴안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을까? 아니면 어깨를 붙잡으려고 했는데 손이 미끄러져 조금 더 나아간 것이 문제였을까? 나의 두 손은 의도하지 않게 볼록한 무언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녀의 슴...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어허....손 조심....



딜레마,

진퇴양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손을 놓으면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게 되고, 그대로 있으면 내가 치한이 되어버리는 상황. 그대로 끌어올려 일으켜 세우다가는 양손에 힘이 더 들어갈 것이다. 어쩔 것이랴.

그렇게 한 5초 정도 있었을까?

시인 박인환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입술, 눈망울은/내 가슴에 있네"라고 썼다. 나는 이렇게 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감촉, 뭉클함은

내 손바닥에 있네


아, 그러나,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약관의, 나름 귀여운 실수를 하얀 코털이 엄연히 존재하는 작금의 나이에 글로 재현하자니, 이건 뭐 완전 늙다리 변태 아재처럼 징그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부디 알아달라. 당시의 나에겐 아무런 음욕이 없었음을. 우발적 당황 앞에서는 춘정이 약동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음을.


그리고 살다보면,

순간이 박제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것을.



나도 한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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