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질감 애호가의 19금 변
위 사진은 후배의 집에서 빌려온 고서... 아니, 옛날에 출판된 책이다. 승려 시인 김정휴의 수필집 <흙과 바람으로 가는 불빛>.
종이는 누렇게 바랬다.
오랜만에 세로로 나열된 글을 읽으니 다소 집중이 안 된다. 중딩 시절에 본 <혈의 누>나 <상록수>, 그리고 <첫사랑>도 모두 세로 쓰기 판본이었는데 그때는 잘 읽히던 것이 작금에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세로 쓰기 판본의 책을 읽으면... 뭐랄까, 어스름한 향수 같은 것이 느껴진달까.
전자책이 존재함에도 공간을 차지하는 종이책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마도 생활의 관성 때문일 거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컴퓨터 화면으로 잘 안 보는 것은 아마도 화면에는 침을 묻힐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평론가 이동진 말마따나 물성ㅡ종이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아서일 거다.
질감, 그것이 문제다.
전에는 이게 궁금하였더랬다. 왜 드러머들은 전자 드럼 보다 어쿠스틱 드럼을 선호할까? 어쿠스틱 드럼은 볼륨 조절도 안 되고 때가 되면 드럼 피나 심벌도 교체해 주어야 하며, 나무 재질의 스틱도 심벌의 날에 갈리는 통에 자주 교체해 주어야 한다. 여러모로 돈이 들고 번거로운 그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뭘까?
이제는 알 것 같다. 전자 드럼의 경우 북은 일단 차치하고, 하이햇 심벌의 경우 재질이 금속이 아닌 고무인지라 헤드폰을 쓰고 치지 않으면 고무판을 치는 '택택'하는 소리가 다 들린다. '챙챙'이나 '칫칫'이 아닌 '택택'이라니!
무엇보다 스틱을 통해 손끝에 전해지는 질감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 아마 드러머들이 어쿠스틱 드럼을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한 번은 심술궂은 어떤 친구가 허벅지에 바늘을 찌르던 조선시대 과부 같은 처지의 나를 놀리기 위해 유튜브의 어떤 영상을 보여주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리얼돌 하나 들이삼
정말 리얼하지 않음?
이보게, 나는 변태가 아니오,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는 남겨놓고 싶소, 하고 대답했지만 그는 실눈을 뜨고 '웃기고 자빠졌네'하는 투의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아, 그때 진심 여부와는 상관없이 씨알이 먹힐만한 대답을 했어야만 했는데.
이보게
리얼돌이 제아무리 정교하다고는 하나
어디 사람의 물성ㅡ질감에 갈음하겠소?
하고 말이다.
질감은 중요하다. 문득 고딩시절에 본 <크리스탈 하트>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극 중 남주는 특이한 병으로 인해 유리벽으로 차단된 방에서 지낸다. 여주는 잘 나가는 유명 가수다. 여주는 어떤 연유로 인해 가십거리가 필요했는지 그와의 만남을 추진한다.
그러다가 (빤하지 뭐)둘은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남주가 크리스탈 룸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거다. 물론 여주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세균이 옮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들은 소위 플라토닉 러브라는 것을 했을까?
당근이지, 이 영화는 정신적 교감만으로도 성애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중점으로 연출할 거야,라고 감독이 우겼다면 아마 그는 제작자나 투자자들에 의해 해고가 되었겠지. 그런 이유에서라도 이 영화에서는 베드신... 아니 에로씬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존 레넌이 가사로 말하지 않았나. 'Love is touch'라고. 그러니 에로씬은 필수다.
하여 올 누드의 두 주인공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거머리처럼 철썩 들러붙어서 쓰담쓰담, 비비적비비적......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유리벽이 그들이 서로에게 느낄 질감을 차단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마도 그들은 상상의 힘을 발동했을 거다. 폰으로도 가능하다는데, 유리벽은 그래도 보이기는 하잖아?
그래서 나도 드럼 연습을 할 때마다 상상의 힘을 이끌어 내어,
이것은 고무판이 아니야
금속 재질의 하이햇이야
하며 극복하려고 애쓰지만, 어떡하랴. 감각은 정신보다 우위에 있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제아무리 리얼하고 어여쁜 리얼돌이라 할지라도 외면을 해버리고 마는, 너무나 질감을 중요시하는 인간에게는 하등 부질없는 것을.
이제 제목에 대한 답을 할 때가 되었다.
어쿠스틱 드럼은 타격 시 질감이 좋다. 문제는 볼륨 조절이 안 되기 때문에 이걸 구입해도 둘 때가 없다는 거다. 큰 소리로 인해 민원이 들어올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언젠가는 700만 원짜리 펄 드럼과 함께 지하실로 꺼지련다. 남들이 고층의 아파트, 혹은 타워팰리스를 선호하더라도 '아싸'인 나는 지하실을 선택할 거다.
혹시 알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처럼 나름 '달콤한 비애감' 정도는 느끼며 살 수 있게 될지.
https://youtu.be/ivdYkmnyiyQ?si=3VvMexzyGw4xZK4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