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체이탈

ㅡ50초만 버텨라

by 지얼


고딩시절의 담임 쌤 별명은 '곰'이었다.

덩치가 있어서 그런 별명이 붙었을 거다.

개인적으로는 흉포함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만.


어느 날 '곰'이 교칙을 넘어서는 자의적인 명을 내린다.

내일부터 아침 7시까지 등교하라는 것.

원래의 등교 시간인 7시 30분보다 30분을 앞당겼다. 아마도 아침 일찍 나와서 30분이라도 더 공부하라는 의도였을 터.


그러나 삶에는 루틴이라는 것이 있다. 30분을 앞당긴다는 것은 개인적 삶의 루틴에 대한 강제이자 강압이다.

그렇다고 이런 생각으로 항명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루틴대로 한 결과였다. 뭐, 물론 곰의 입장에서는 자신에 대한 불복종에 불쾌할 수도 있었겠지.

그날 나는 학우들이 보는 앞에서 따귀를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사랑의 매?

훈육의 매?

귀싸대기 연타가 폭력성의 표출이나 사디즘의 분출이 아니고 '사랑'이자 '훈육'이라 나는 붓다이자 예수 그리스도다.


실컷 두들겨 맞았을 때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억울했던 것이다.





초로의 한 지인 분으로부터 오래전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인가 그 양반이 길을 가다 보니, 건물 담벼락의 한 구석에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한 처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더란다. 그리하여 다가가서 준엄하게 꾸짖다가('여자가 감히!' 뭐 이런 내용이었겠지) 결국 손찌검(따귀 타격)에 이르렀다고.

내가 말했다.

"아니, 그렇다고 다 큰 여자를 때리면 어떡합니까?"

대답은 못 들었다.


학생이 선생의 말을 안 듣고 지각하는 것과, 그 학생을 선생이 폭력으로 응징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심각한 위법 사항일까? 성인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과 그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위법한 일일까?

초딩 2학년 때의 한 담임 쌤은, 학생(여학생이었다)이 실내화를 안 가지고 왔다는 이유, 그리고 실외화를 실내에서 신고 다녔다는 이유로 그 여학생의 뺨을 때린 후에 칠판 옆에 세우고는 그녀의 신발을 입에 물고 서 있게 하였다.

이런 사디즘 변태 같은 행위가 훈육이라고? 작은 교칙을 어긴 것이 폭력보다 중한 잘못이라고?

그렇다고 대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존중한다. 뭐 어쩌겠는가. 밥을 먹은 후 대변으로 인해 배가 묵직해지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무거워지는 이들도 항시 일정 비율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세상에는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혹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사람을 구금하여 두들겨 팬 후에 피해자의 권리를 자기 것인 양 강제로 탈취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는 행각에 대해서 '정당한 정치적 행위'라고 핏발을 세우며 옹호하는 닝겐들도 있음을 어찌하리.


서점에서 우연히 <침묵>과 <깊은 강>의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수필을 보는 도중에 다소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학교 선생의 무자비한 구타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이건 내가 고딩시절에 겪은 것과 똑같지 않은가.

국어 시간 도중에 민방위 훈련 알림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국어 선생의 지시대로 의자를 책상 위에 뒤집어 올려놓은 후 책상 밑에 몸을 숨겼다.

무료해진 나와 옆 자리 친구가 속삭이며 잡담을 나누었을 때, 국어 선생은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해라"하고 말했다. 잠시 침묵을 이어가다가 다시금 무료해진 우리는 다시 속닥이기 시작하였다.

"아, 이놈 자슥들. 좀 조용히 하라니까." 나를 향해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떠들었냐? 이리 나와."

앞에 다가서자 그가 안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내 뺨을 가볍게 톡 치면서 말했다. "그렇게 지겹냐? 왜 떠드냐..." 그것은 구타라고 할 수 없는,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그저 가벼운 접촉에 불과했다. 그가 다시 내 뺨을 손바닥으로 쳤다. 첫 번째 것보다는 다소 힘이 실렸지만 사실 구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떠들지 말라니까." 그리고 웃으며 세 번째 따귀를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조금은 실린 것 같다. 그리고 네 번째, 이번 것은 다소 중후하다. 다섯 번째, 고개가 살짝 돌아간다. "이 새끼가 선생 말을 개X으로 아는 거야 뭐야" 여섯 번째, 이건 확실히 타격감이 다르다. 꽤 아프다. 이것은 감정의 무게다.

그때 깨달았다. 음악에서 뿐만 아니라 구타에서도 크레센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자그마한 최초의 불씨는 제어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증폭될 수 있다는 것을.

엔도 슈사쿠 작가도 동일한 경험을 했었다니, 이것은 아마도 나만의 섣부른 진단은 아닐 것이다.


문득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생각난다. 주인공 '현수(권상우 분)'가 친구인 '종혁(차종훈 분)'과 주먹질하며 크게 다투는 장면이다. 이를 본 교련 쌤은 이들을 자신의 사무실로 끌고 간 후, 발로 짓밟는 등 모질게 두들겨 팬다.

이런 장면은 참으로 기괴하다. 학생들이 체벌을 받는 이유는 폭력의 행사일 테고 체벌을 통한 훈육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 폭력은 나쁘다'는 것일 텐데, 폭력에 대한 체벌로 또 다른 폭력이라니. 아니, 그보다 더 가혹한 발길질의 폭력이라니.

권상우의 단말마와도 같은 울분의 성토가 떠오른다.


대한민국 학교,

조까라 그래




가끔 생각한다.

민방위 훈련 때의 속삭임에 가까운 사담 행위와 도합 여섯일곱 번의 구타 중 어느 것이 더 악질적인 것일까, 하고. 그럴 때마다 어떤 철학자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인간의)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는. 아마 '정념'의 자리에 '감정'을 대입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얘기일 것이다.

감정은 증폭된다.

공격성은 증폭된다.


현자, 혹은 깨달은 분들은 이렇게 분노의 상황을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

'아, 내가 지금 화가 나 있구나'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른바 '알아차림'이라는 거다.

이는 마치 내가 유체이탈을 하는 것과 같다.

유체이탈한 '영'으로서의 '나'가 '존나 빡쳐있는 나'를 내려다본다.

그렇게 '존나 빡쳐있음'을 알아차린 채 50초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종종 이 방법을 시도한다. 하지만 아직은 서투른 탓에 유체이탈의 시점이 간발의 차이로 늦어진다.

시발.

욕이 먼저 튀어나온 후에 유체이탈이 시작되는 거다. 아니, 이 말은 거짓이다. '시발'이 튀어나오는 순간 유체이탈의 의지 자체가 증발되어 버리니까.

분노의 증폭을 경험한 후에 찾아오는 현타. 비로소 기능하는 유체이탈.

오늘도 실패다....

어제도, 오늘도 그랬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도 내 안의 헐크 '마돌이'를 길들이려는 싸움을 계속하겠지.


싯다르타가 탁발을 위해 집집마다 방문을 했을 때의 일이다.

친절한 집주인은 그에게 기꺼이 남은 밥이라도 보시했지만, 못된 집주인은 욕을 하면서 내쫓는다.

"저리 꺼져, 이 비렁뱅이야."

아마 이러지 않았을까.

그때 싯다르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대체 왜?

마돌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참자아, 또는 진여로서의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를 향한 욕설은 내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의 것임을. 그의 것을 내가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탐진치 3독의 하나인 분노심이 폭발한다는 것을.

그것은 자체의 앰프를 지니고 있어서 주파수를 높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사소한 감정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 넣음으로써 분노의 불길을 키울 수도 있다는 것을 고딩시절의 국어 선생이 알려주지 않았던가.


'곰'과 국어 선생을 생각한다.

그들도 선생이었을까?

선생 맞다.

반면교사로서의 선생.

그들도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긴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https://youtu.be/K6PwUG283DU?si=-pt2cd-9o8qfmE2r

"We don`t need no education"

Pink Floyd. <Another brick in the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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