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겨울.
H 호수를 따라 길게 나 있는 산책로를 한 시간가량 걸었다. 봄날이 지척임에도 길 곳곳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어서 몇 번인가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한참을 걷고 있는 도중 동행인인 후배 M군이 내게 말한다.
"선배는 풍경을 보지 않네?"
문득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은 얼어붙은 호수와 나무들을 향해 있지만 주시하지는 않는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 머릿속의 풍경들을 보느라고."
어떤 날은 지난날의 이런저런 일들, 기대가 빚어낸 결코 현실화되지 못한 열망들로 가득한 머릿속 풍경이 안구에 스치는 풍경보다 더 선명하다.
M군이 백내장에 걸린 수정체처럼 허옇게 얼어붙은 호수를 바라보며 말한다.
"겨울 호수는 별로네. 왠지 알아요? 하늘이 파랗게 비치지 않아서 그래요."
머릿속 풍경이 가득한 날의 안구는 겨울 호수 같다.
그것은 적요 그 자체다.
머릿속 풍경은 홀로 그리는 것.
그 적요 속에서, 차라리 평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소음의 소거.
내 사적인 평화의 조건.
1999년 12월 31일.
밀레니엄.
거리는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흥분으로 상기된 표정을 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자동차 위에 올라앉은 사람들, 지하철 출구 건물의 지붕 위에서 뭔가를 향해 소리 지르던 사람들, 차도로 쏟아져 나와 인도를 무색하게 만든 무수한 사람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들리던, 연예인들의 노래와 춤. 거리는 축제 그 자체였고 달뜬 사람들의 얼굴은 축제 분위기와 달빛으로 환했을 것이다.
친구의 반 강요로 거리로 내몰린 나는 어지러운 인파 속에서 길을 잃고 정신을 빼앗겼다. 신음 대신 가벼운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람들로부터 쏟아져 나온 온갖 음성들, 어지러운 음파들의 중복, 청각을 교란시키는 장소에 대한 혐오.
한때 소주방이라는 곳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적은 양의 안주거리가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되는, 비교적 젊은 분위기의 이곳을 두세 번 정도 친구들의 권유로 인해 들어간 적이 있다. 하지만 내 기억에 남는 술자리로 소주방 따위는 적합한 곳이 되지 못한다. 음악... 요란한 음악들이 문제인 것이다. 손님들이 많을수록 음악의 볼륨은 높아져 간다.
이유가 뭘까? 20년 전에, 디제이 박스가 있었던 한 카페에서 디제이로 일하던 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손님이 많아서 자리가 없을 때에는 대화가 큰 소리로서만 소통 가능할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부러 볼륨을 높인다고 한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목소리도 커지게 되고... 그쯤 되면 소란함을 이기지 못하는 손님들은 자리를 뜬다는 것이다. 음악이 가끔 본래 취지를 거슬러 이런 식으로 소비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날의 소주방이 그랬다. 과도한 볼륨 탓에 의사소통을 포기함으로써 오는 권태감을 과음과 폭식으로 지웠다.
소요에 지쳤을 때,
관계의 불협화음에 귀가 먹먹해졌을 때,
기타, 소설책, 그리고 간소한 도시락을 들고 올림픽 공원을 홀로 찾아갔다.
한적하고 긴 산책길을 좋아했고 피크닉장의 석탁과 풍향계를 좋아했다. 가끔 찾아와서 모이를 요구하는 비둘기 무리들이 좋았고 언제든 마음이 내키면 누워서 잠들 수 있는 기다란 벤치가 좋았다. 햇볕을 가려주는 나무 그늘이 좋았고, 눈을 감은 얼굴로 가볍게 날아드는 무색무취의 미풍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육성이 배제된, 고요함이 좋았다.
평일 오후의 피크닉장 벤치에 누워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나뭇잎 사이와 잔디 위를 유영하는 바람소리와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울하지만 감내하다 보면 은근한 쾌감이 되기도 하는 고독감, 지난 기억들의 미로를 헤매다가 문득 빠져드는 졸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한적함. 그리고 평화.
만일 신이 크눌프에게 그랬듯이 그때 내게 나타나서 만족하느냐고 물었다면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처럼 북적이지 않는 한, 아마도 난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눈밭이 아닌 벤치에 누워.
조르주 피에르 쇠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영화 <캐스트어웨이>에서, 조난으로 인해 무인도에서 홀로 생존해야 하는 주인공 척(탐행크스 분)은 고독감을 견디지 못해 배구공에 얼굴을 그려놓은 후 '윌슨'이라 이름 붙이고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대화를 한다. 그 상황을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만날 수 없었던 그 누군가가 그리울 때 상상으로 대화를 하곤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적과도 같은 고적한 생활을 지향하는 때가 잦다. 가장 가까워야 할 주변의 그 누군가가 에너지 뱀파이어처럼 내 삶의 기력을 앗아갈 때 특히 그러하다.
누군가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소통 가능한 공존이라고. 긍정적인 이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는 부정의 관점을 선호한다. 내 삶을 지속적으로 무기력하게 조장하거나 내 삶에서 농담과 웃음을 지우려 드는 타자의 부재.
그것이 행복이다. 최소한의 기본값으로서.
그럼에도 행복의 최소 단위였던 고독을 쓴 맛 나는 백태처럼 변질시키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나는 침을 뱉으며 거리로 향했다. 침 뱉기로도 사라지지 않는 쓴 맛의 혓바닥을 알코올로 닦아냈고 잠시 동안은 쓴 맛을 잊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그 생활에 길들여졌다.
그러다가 고막을 찢는 나이트클럽의 과도한 음향들과 거리의 소음들, 그리고 결코 잡을 수 없었던 열망들에 시들어 갈 즈음 온갖 시큼한 내음이 뒤섞인 골목의 한 구석에서 그만 돌아가라는 소리를 듣는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욕망들'에 불을 지피지 않도록, 등질화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도록, 고적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도록 이렇게 소란스러운 집단적 유형지에서 떠나가라는 소리를.
그 평일의 고요했던 공원은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라거나, "너는 무엇을 이루어야 하니?"라는 물음조차 비켜나가는ㅡ'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망집조차 고개를 들지 못했던 장소였다. 삿된 욕망을 무력화할 수 있었던 오직 현재의 자리.
오랫동안 그 장소를 잊고 살았다.
찬바람이 인파의 소음처럼 속살을 파고드는 새벽녘의 피로한 거리에서 문득 그곳을 추억한다.
그리고 올림픽 공원에 홀로 서 있는 나무를 생각한다.
최소한의 기본값으로서의 평화가 있는 그곳.
나는 병아리를 기르지 않았으므로 솔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 인간 솔개는 두려워했다.
ㅡ헨리 데이빗 소로 <월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