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눌이나 여친에게 절대 해주어서는 안 된다는 운전 연수 도우미역할을 절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연상의 여성 분에게 해주고 있는 거다.
익숙한 나머지 내게는 너무나 수월한 것을 남들이 쩔쩔매며 행하는 모습을 목도할 때면 문득 TV의 한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그림 그리기를 가르쳐 주던 화가 밥 로스의 그 유명한 말버릇이 떠오른다.
여러분들도 한번 해 보세요, 참 쉬워요.
한 기타 쌤의 경험담도 떠오른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스페인에 유학 갔을 때, 그 음악원의 기타 쌤은 스케일을 엄청 빨리 연주했었죠. 시범을 보이더니 제게 이러더라고요. “너도 한 번 해봐. 이렇게(후루루루루루룩~)! 왜, 잘 안 돼? 그냥 손가락을 빨리 움직이면 되는 건데?”
니 똥 굵다.
자랑질 좀 하겠다. 유치원을 구경도 못한 나는 한글을 4~5세 경에 깨쳤다(내 똥도 굵다). 그래서 초딩 1학년 때 국어책을 읽지 못하는 어느 여학생을 볼 때마다 심히 답답해했더랬다. ‘-2x-2’의 답이 왜 -4가 아니고 4가 되는지를 아직까지도 이해를 못 하는 수학 바보인 주제에 오만이라니.
운전 연수 3일째, 30km/hour에 불과한 속도임에도 여전히 차선을 못 지키는 것을 지켜보면서 오만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것을 느낀다. 문득 기타의 C코드 운지가 어렵다는 한 원생 분의 애처로운 호소가 귓가에 맴돈다. 그때 아마도 이렇게 말했겠지.
저처럼 해 보세요. 참 쉬워요.
초심의 겸허함을 되찾는 방법을 안다. 왼손이 아닌 오른손으로 C코드를 잡아 보는 것이다.
무지 어렵다.
하지만 운전의 초심은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발로 핸들을 돌리면 가능할까?
조수석에 자리를 잡고 안전벨트를 맨 다음 좌석을 최대한 뒤로 밀어놓는다. 오른손으로는 측면 윈도우 상단의 손잡이를 움켜잡는다. 아, 그냥 버릇이에요.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한다.
살충제를 머금은 구더기처럼 기어가던 차가 어느덧 정상 속도(?) 40km/hour를 회복한다.
어, 어...... 정지! 조수석에서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급격히 차가 정지한다. 운전 도중 백미러의 각도를 조정하시는 통에 하마터면 가드레일에 박을 뻔했다. 어머, 미안해… 안 다쳤니? 놀랐지?
나는 이렇게 답변한다. 이 정도 속도로는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아요, 단지 차가 찌그러질까 봐 그러지.
나의 대답에는 영혼이 없다. "왕초보가 한눈을 팔면 어떡해요! 죽을 뻔 했잖아요!"라고 꾸짖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머릿속의 붉은 경고등이 번쩍인다.
흔히들 마눌님의 운전 연수를 돕지 말라고 한다. 잠재적 부상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인해 수컷이 날을 세울 경우 잘하면 혼밥 신세가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크게 염려하지는 말자. 편의점 도시락도 나름 맛있으니까.)
원생인 혜승(가명) 양이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다. 남친에게 운전연수를 받았는데요, 저를 얼마나 갈궜는지 몰라요.
문득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나오는 얘기가 떠오른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결혼 당사자들이 가족을 부양할 충분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지 못하면 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는데, 이를 국가의 정당한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결혼 당사자들이 성격상 온화함과 인내심을 증명하지 못하면 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해야 하는데, 이를 국가의 정당한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증명 방식 중 운전 연수 도우미 역할이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도널 글리슨, 레이철 맥아덤스 주연의 영화 <어바웃 타임>의 한 장면.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하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결혼을 곧 앞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바로 상냥한 남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상냥한 수컷이라면 잠재적 부상에의 불안과 공포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설령 네 몸은 다치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이 차가 인근 개천으로 굴러 떨어져서 피칠갑과 함께 전치 16주짜리 부상을 입게 되더라도 꼭 이렇게 얘기하리라. 저는 멀쩡해요(단지 머리에서 육수가 흐르고 그저 갈비뼈가 한두 개쯤 부러졌을 뿐이에요), 쌤께서는…이런, 찰과상을 입으셨군요. 얼른 병원으로 모셔야겠어요.
그러나 아, 상상과 현실의 갭은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넓다.
나는 지금 아점(아침+점심)으로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있다.
물론 운전 연수가 이유는 아니다. 아마도 생활 전반에서 상냥함이 부족했던 탓일 것이다.
영혼 깊숙이 상냥함을 체화하라.
그러면 당신에게 언젠가 레이철 맥아덤스를 닮은 그 누군가의 운전 연수를 도와주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