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산에서 삼겹살과 소고기 파티를 즐기며
"베트남 산에서는 고기를 구워 먹어도 되나요?"
코비드 19 이전에 산이 없는 호찌민에서 산행을 하기 위해 호찌민 산악회를 발족했었다. 가족 단위로 차를 빌리고 산행하기보다는 단체로 움직이는 것이 편안했기 때문이다. 호찌민 산악회는 속칭으로 '호산회'로 명명하여 카카오톡으로 회원 모집을 했다.
그때 한 분이 카톡으로 한 질문이다. 나는 이렇게 답변을 보냈다.
"여기는 한국과 달리 산을 지키는 사람도 없고 무엇을 해 먹든지 특별한 규제가 없습니다. 단지 외국이라서 특별히 더 조심해서 행동해야만 합니다."
실제 베트남 산에는 특별한 규제가 없다. 한국의 가을과 겨울철의 대형 산불 같은 사고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산에 가도 열대 지방 특유의 푸르름만 느낄 수 있다. 산불을 유발할 갈대나 마른 나뭇가지가 거의 없다.
베트남에서 산행을 하면 특이한 풍경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 한국과 다르게 산길이 잘 닦여져서 오토바이를 타고 산을 오르는 사람도 많다. 처음에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토바이 천국의 풍경이었다.
두 번째, 산 정상 가까이 식당이 있다. 그곳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도 있지만 입맛이 맞지 않기 때문에 자리를 빌릴 수 있다. 누이 수오이다(수석산)로 가면 그곳의 식당을 빌려 숯불과 그릇을 구입해서 식사를 했다.
세 번째, 식당 근처의 해먹(나무와 나무 사이 잠자는 그물)이 있어 졸음이 오면 잠시 잠을 잘 수 있다. 숲에 있는 해먹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토막잠을 자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다섯 번째, 오토바이 행상을 통해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를 구입할 수 있다. 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을 오토바이 행상이 돌아다닌다. 그곳에서 필요한 것을 구입할 수 있다.
여섯 번째, 버너를 가지고 가면 어디서든 간단한 요리를 해서 먹을 수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불을 피워서 음식을 해 먹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한국에서의 산행과 약간은 차이가 있지만 산은 변함없이 모두를 반긴다. 키 큰 나무 아래에서 쉴 수도 있고 땡볕이 쏟아지는 산 중턱을 걸어갈 수도 있다.
나는 베트남에서의 산행이 너무 좋았다. 매달 3주 차나 4주 차에 여러 회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산이 없고 지대가 낮은 호찌민에서 저기압에 억눌린 심장을 위해서는 산행이 절실히 필요하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해발 600미터를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누이 수오이다(수석산)의 7부 능선
호찌민 산악회는 산행을 할 때 2개의 팀으로 구성했다.
산악팀은 산의 입구에서부터 정상 가까이 걸어오는 코스였다. 반면에 산행팀은 7부 능선까지 차로 이동해서 근처 정상이나 산을 천천히 산행하는 코스였다. 어린이들이나 노인들을 위해 산행팀은 필수였다.
산행팀은 차가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곳에서 하차하여 천천히 쉬며 산책을 즐긴다.
나는 주로 산행팀에 속해서 산책을 즐긴다. 한 번은 산악팀으로 등산을 했다. 뜨거운 햇살과 열대 특유의 공기팽창으로 산소 포화도가 심하게 떨어졌다. 쉴세 없이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했다. 그다음부터는 절대로 산악팀은 가지 않았다. 산행팀으로 산책을 하면 베트남이라고 단정할만한 특이점이 없다.
호찌민 근처의 산은 특히 그랬다. 중부나 북부의 산은 아직 오르지 못했지만 누이 수오이다(수석산)는 한국의 보통 낮은 산과 크게 구별점이 없었다. 열대지방 특유의 정글에서 발견되는 독충이나 독사, 독초들도 거의 없다. 코비드 19 이전에 매달 산행을 했지만 한 번도 그와 유사한 것을 발견한 적이 없다.
말레이시아에서 산행을 할 때는 독충이나 독사, 독초들에 대한 경계를 많이 했다. 원주민이 아닌 외국인들의 안전사고가 간혹 있기도 했다. 하지만 호찌민 근교의 산은 서울 근교의 낮은 산과 큰 차이가 없다.
나는 서울에 살 때는 북한산과 청계산, 우면산 등을 자주 다녔다. 우면산과 청계산은 주로 야간산행으로 혼자 다녔다. 우면산은 한밤이라도 간혹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지만 청계산은 조용했다.
그래서 청계산 야간 산행을 할 때는 밤 12시에서 3시 사이에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홀로 명상을 하면 솔향이 진하게 풍겼다. 지금에야 말할 수 있지만, 당시 나는 버너를 준비해서 소고기를 굽거나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한국의 산에서 걸리면 최소 벌금 100만 원 이상이 부과되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짜릿했다.
라면 하나 끓여 먹는 것이 최소 100만 원 이상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그런 법률이 없다. 어디서든 가벼운 요리를 해 먹을 수가 있다. 또 그것을 베트남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도 않는다. 열대지방 산행의 맛이 따로 있는 것이다.
누이 수오이다(수석산)의 산속 로컬 식당
산속 원주민이 식당을 하며 거주하는 공간은 원시와 현대가 만난 느낌이 있었다.
나무로 대충 골격을 만들고 비닐과 양철로 천정을 막아놓았다. 바닥은 흙 그대로이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거의 모든 시설이 산골생활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곳은 해발 500미터 정도에 위치해 있지만 차가 들어올 수 있는 비포장도로가 있었다. 나는 보통 산행을 하고 점심 식사를 이곳에서 했다. 숲에서 하면 수많은 모기떼나 벌레 때문에 편치가 않기 때문이다.
식당 주인은 순박한 베트남 사람으로 인심이 후했다.
무엇이든 공짜로 주려고 했지만 입맛이 안 맞아서 여러 번 사양해야 했다.
한 번은 뭔가 도움이 돼주려고 그곳에서 키우는 닭과 오리를 주문했다. 닭과 오리를 백숙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너무 질겨서 씹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키우는 개들만 포식하게 했다. 자연산 닭과 오리였지만 지나치게 질겨서 버리기는 아깝고 해서 개에게 먹인 것이었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그곳에서 음식을 주문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한국 식당에서 오리고기를 주문하거나 소고기, 돼지고기를 주문해서 산으로 갔다.
산속 로컬 식당에서는 점심식사를 여기서 하겠다고 하면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대여해 주기 때문이었다.
한국과 달리 단지 식당 대여비만 지불하는데도 그들은 친절했다.
음식이나 음료수를 판매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항상 웃으면서 친절하게 응대를 해주었다.
한 번은 대여비가 저렴하고 친절하다고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이 따로 팁을 주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은 베트남식 방법으로 베트남인들을 대해야 합니다. 만약 여기서 팁을 주거나 대여비를 올려주면 다음에 다른 한국인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실제 그랬다. 그들에게 필요이상의 친절을 베풀면 그들은 권리로 인식하고 다음에는 더 이상을 원했다.
심지어 시장의 야채가게 같은 곳에서는 단골이 되면 오히려 손해였다. 한국은 단골을 소중히 생각하고 가격을 저렴하게 해 준다. 하지만 베트남사람들은 단골은 오히려 가격을 올려서 판매했다. 그 이유는 단골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과 너무나 다른 단골 문화 혹은 친절의 문화가 있는 것이었다.
해발 600미터에 위치한 산속 사찰
산 정상의 사찰로 이어진 계단이다.
이곳의 절은 구태여 사찰이라고 하기보다는 산속의 휴식터와 같았다. 차와 음료를 무료로 제공해 주고 그곳에서 쉴 수 있게 꾸며 놓았다. 전혀 종교와 관계없이 쉬었다 가기에 아주 좋은 공간이었다.
베트남의 산사는 한국과 달리 자유로운 왕래를 하며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셔도 그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감시와 통제가 느슨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쉬기도 하고 가끔씩은 해먹에 누워 단잠을 자기도 했다. 이곳은 누이 수오이다의 정상 중 하나이기도 해서 사방으로 전망이 아름다웠다. 이곳의 스님들은 한국과 달리 권위적이지도 않고 격식도 그리 따지지 않았다. 베트남식 스님의 옷을 입었지만 일반인과 큰 다를 바가 없었다. 말을 친근하게 걸기도 했고 이것저것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답변을 해 주었다.
한국과 달리 특이한 것은 그곳에서는 약재와 약주를 판매했다.
"이 약재는 무엇에 좋나요?"
베트남어로 물어보면 그들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증세에 다 좋아요. 암에 특히 좋은 효과가 있어요."
"무슨 암에 좋은가요?"
"모든 암에 다 좋아요. 아주 좋은 약재입니다."
그들은 구체적인 것은 몰랐다. 그냥 몸에 좋고 암에 효과가 좋다는 말만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그곳에서 약재와 약재를 구입했다. 잠시 그곳에 쉬게 해 준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하고 약재와 약주를 시험하고 싶기도 했다. 베트남은 한국과 달리 사찰에서 약재나 약주를 판매한다. 특이한 것은 약주를 담가 놓고선 한 번씩 시식해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약주를 마셔보면 도수가 40% 이상인 베트남의 전통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한국의 안동소주와 비슷하게 쓰고 알코올 강도가 셌다.
처음 그 산에 갔을 때는 점심 식사를 할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스님한테 한번 물어보았다.
"이곳에서 식사를 해도 되나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식사를 해도 됩니다. 다만 고기를 구우시면 안 됩니다."
그때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잔뜩 준비해 왔기 때문에 그곳에서 식사는 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베트남의 전통 음식이나 가정식 백반이 입맛이 맞지 않다. 그러한 점 때문에 식사준비를 해 간 것이었다.
베트남 산속의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
누이 수오이다는 어린이가 산행을 해도 피곤하지 않는 정도의 코스가 참 좋았다.
하지만 이 사진을 찍고 산행을 할 당시 나는 심각한 좌측 발가락 염증이 있었다. 열대 지방에서는 어느 날 이름 모를 염증이 생기기도 했다. 그 이유는 모르지만 좌측 엄지발가락과 검지 발가락에 극심한 염증이 생겼다.
아마도 독충이 물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알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아픈 다리를 절뚝이며 걸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해발 600미터를 천천히 산행하며 충분히 힐링을 했다. 보통 산속 체류 시간은 길어야 5시간에서 6시간 남짓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해발 2미터의 저지대에서 무려 해발 600미터의 산행은 심장 보오링에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심장은 저지대가 되면 박동이나 기능이 저하된다. 그 영향은 미세하지만 뚜렷하게 있다.
그 차이는 내원한 환자들의 질문을 통해 확인을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잠을 잘 자는데, 왜 호찌민에만 오면 잠이 잘 오지 않을까요?"
또 어떤 환자는 이렇게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는 소화가 늘 잘 됐어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왜 소화가 잘 될까요?"
실제로 많은 환자들의 건강상태가 열대지방이라는 기후보다 저지대 호찌민의 해발과 관계가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호찌민이나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그런 증세가 없기 때문이었다.
호찌민의 해발은 보통 2미터에서 5미터이며 산이 없어서 미세 먼지가 많다. 그러한 자연적 환경은 당연히 인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나이가 많거나 여성의 경우엔 영향이 더 예민하게 나타난다.
베트남의 경우엔 다른 나라와 달리 마님(여유가 있는 한국인 여성을 뜻하는 용어)들은 한국에 자주 나간다.
그들은 대개 한, 두 달간은 호찌민과 한국을 번갈아 가며 생활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덩달아 약화되기 쉽다. 호찌민에 와보면 특이한 현상 한 가지는 노인인구가 극히 적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통에 다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은 1975년에 끝났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9년 전이다. 당시 15세였으면 지금은 64세이다. 그런데 호찌민엔 60대와 70대 인구가 지극히 작다. 그 이유는 기후와 환경 때문에 평균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실제 7군에 살 때 보면 50대와 60대 초의 죽음이 대단히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음식과 해발이 낮은 저지대, 그리고 열대의 날씨로 인해 평균수명이 실질적으로 짧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마님들의 한국과 호찌민 번갈이 살이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셈이다. 나 역시 호찌민 이전 후에 심각한 소화장애와 컨디션 저하를 느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열대의 날씨와 호찌민의 낮은 해발, 공기 팽창으로 인한 산소포화도의 저하 등 때문이다.
따라서 호찌민에서 산행을 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건강에 이롭다. 정신건강상으로는 가슴이 툭 트이는 시원함과 맑은 공기이다. 육체적으로는 산소흡입과 심장기능 강화, 신장기능 정상화 등의 효과가 있다.
나는 앞으로도 호찌민 산악회를 계속 이끌어갈 생각이다. 가끔씩 산바람을 쐬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로운 삶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