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사람들의 심리가 깔린 언어와 그들의 독특한 사고와 문화
“왜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특별하게 센지 아세요?”
베트남 거주 30년이 넘는 분이 저한테 질문을 했다. 일단 그렇게 오래 사신 분이 한 질문에 대한 답은 금방 찾을 수가 없었다. 만약 여기 온 지 2년이나 3년 정도 된 분이 질문을 했으면 답을 했을 것이다. 나는 일단 이렇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들이 자존심이 센가요?”
“그들이 자존심이 센 이유는 1000년 넘게 외세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을 이겨낸 힘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 오래 거주하며 살펴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외국인한테 친절하지만 그들한테 배우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더군요.”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동의를 표했다.
“예, 맞는 것 같습니다. 한국인들도 아마 외국인의 관점에서는 자존심이 센 것으로 보여질 것 같습니다. 오랜 외세 침략을 받으며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무의식의 작용이 자존심으로 나타난 것이겠지요.”
한국은 국제적인 축구경기를 하면 대~한~민~국이라고 외친다. 베트남은 어떠할까?
그들은 베트남 무적이라는 뜻의 ‘비엣남 보딕’(Việt Nam vô địch)이라고 외친다. 베트남 무적이라고 외치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로 충분히 증명이 된다.
실제 그들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중국, 일본, 프랑스를 물리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세계면적의 3분의 2를 정복한 칭기즈칸도 베트남에서 2번이나 패배했다.
베트남은 칭기즈칸이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나라이다. 일본은 섬이라는 지형적 이점으로 인해 칭기즈칸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은 육로가 열려 있는 상태에서 그들을 이겼다. 그들의 대단한 자부심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기도 하고 그런 역사관으로 교육을 받기도 한다.
베트남은 통일전쟁이 끝난 이후에 두 차례의 전쟁을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전쟁은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베트남과 캄보디아 내륙 국경 지역의 국지적인 충돌로 시작했다. 사단 규모의 군사적 충돌로 발전했으며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은 캄보디아로의 전면적인 침공을 단행했다. 그 결과 크메르루주(캄보디아 공산당) 정권을 퇴출시키고, 캄보디아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중국과의 전쟁은 1979년 2월 17일 국경분쟁을 시작으로 일어났다.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리지만, 동원된 두 나라의 병력 규모에 비해 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종료되었다. 그들은 서로가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은 전쟁명분인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의 철군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베트남은 1989년이 되어서야 캄보디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베트남은 최근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 이는 미국이나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상대한 것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에 충분한 결과였다. 베트남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베트남 무적(‘비엣남 보딕’, Việt Nam vô địch)이라고 자긍심을 표했다. 또 한 가지 요인으로는 공산정권의 교육이 주로 조국과 효도 중심으로 이뤄지는 영향도 있다.
그들은 조국과 효도라는 두 개의 개념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 사람들의 효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부모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여기 함께 일하는 간호사들한테 효도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효도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했다. 한국도 예전에 효도가 최고의 가치였고 불효자라는 말이 최고의 욕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간호사들은 이해를 못 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조국과 효도를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다. 한국식으로 하면 충효를 그들은 뚜렷하게 조국과 효도로 인식하며 그렇게 살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조국과 효도와 자존심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조국과 부모를 위해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의식인 것이다.
이상하게 높은 자존심과 변명의 문화
베트남인들은 이상한 자존심과 똥고집이 있다.
일반적으로 자존심과 관련이 없는 사소한 잘못에도 그들은 자존심의 잣대가 있다. 분명히 잘못해도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딴전을 부리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사과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오랜 전쟁의 영향도 있다. 그들은 가까운 미래보다는 당장 처해진 상황을 모면하려는 태도가 많다. 스스로 난처한 상황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고 또 어떤 상황이든 모면하려고 다양한 변명을 한다.
그들이 난처하면 잘하는 말은 나는 몰라요(Tôi không biết)이다.
가끔 한의원에서 특정한 의료기나 물품이 사라져서 간호사에게 물어보면 즉각 이렇게 답변한다.
“나는 몰라요(Tôi không biết)”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고 그 말부터 먼저 한다. 자세히 물어보고 찾아보면 간호사가 치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경우에도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정말 잘 몰라요(Tôi thực sự không biết)”
자기가 치웠으면서도 끝내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모른다는 말을 하고 나선 찾았으면 됐지 않느냐는 표정을 한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알면서도 무조건 모른다고 말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책임을 회피하고 나서 하는 말이 기가 막힌다.
“괜찮아요.(콩 사오, Không sao)”
그들은 그 말을 상황을 빨리 모면하고 지나가자는 뜻으로 한다. 한국인에게 이 말은 이해가 안 된다. 상황이 미해결이거나 재발 예방을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때는 그렇다. 오히려 화를 부추기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이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면 더욱 기가 찬다. 적반하장 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은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이다.’ 이는 잘못한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나무람을 이르는 말이다. 흔히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이 분명히 잘못한 상황인데도 이 말을 쓴다. 그 말은 잘못한 사람이 사과를 할 때 피해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할 말이다. 잘못을 하거나 실수 한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해 줄 때 ‘괜찮아.’라고 한다.
그런데 잘못하거나 실수 한 사람이 ‘괜찮아’라고 하면 적반하장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잘못하고 실수를 하면 ‘죄송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잘 못하고 실수한 측이 “괜찮아요.(콩 사오, Không sao)”하면 기분이 어떨까?
한마디로 기가 차고 어이가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히 여긴다. 또 한국인이 화를 내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하며 혀를 끌끌 차거나 입을 삐쭉거린다. 한국에서 혀를 끌끌 찬다는 것은 어른이 하는 바디랭귀지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혀를 끌끌 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 입을 삐쭉거리는 것은 아이들이 마음에 안 들 때 하는 바디랭귀지다.
그것을 잘못하거나 실수한 사람이 하는 것이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들에게 잘잘못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한테 화를 냈다는 것 자체가 무지 큰 잘못인 것으로 몰고 간다. 그것이 그들 나름의 이상한 자존심으로 나타난다.
베트남어 ‘괜찮아요’의 ‘콩 사오(Không sao)’가 지닌 다양한 뜻
베트남 사람들은 심리적 방어기전이 발달되어 있다.
첫 번째 의미는 ‘괜찮아요’라는 말로 마무리를 하자는 뜻이다. 빨리 상황을 상황이 모면되도록 없던 일로 무마하자는 속뜻이 담겨 있다. 난처한 상황이 확대되거나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말을 한다. 빠르게 전환을 위해서 툭 던지는 말이 ‘콩 사오(괜찮아요.)’이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난처한 상황을 대단히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은 친구를 부르거나 지원군을 불러 모은다. 힘든 상황은 그렇게 빠져나가거나 떼거리가 모이며 오히려 공격을 한다.
두 번째 의미는 ‘그냥 넘어갑시다.’라는 뜻이다. 식민통치와 오랜 전쟁, 사회주의체제의 가난한 생활 등을 참고 넘어가자는 속뜻이 숨겨져 있다. 살아남으려면 그냥 넘어가야 하지 않겠냐는 합의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다른 의미로는 ‘잊고 털어버립시다; 는 청산의 뜻도 있다. 복잡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심리적 사고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의미는 ‘참고 견딥시다.’는 인내를 뜻한다. 가능하면 복잡한 일은 참고 견디며 넘어가자는 단순한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실제 그들은 인내심이 강하며 어지간하면 참고 넘어가려고 한다. 이는 문제 해결을 자꾸 따지며 하지 말고 그냥 참고 대충 지나가자는 타협과 화해의 심리도 들어 있다.
베트남서 살면 이런 말들은 거의 일상화가 되어 있다.
한 번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앞 오토바이를 박은 적이 있다. 내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미안합니다.(신 로이,Xin lỗi) 괜찮은가요? 다친데는 없어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콩 사오(Không sao)”
그 말을 하고 그는 그냥 가는 길을 갔다. 나는 미안했지만 그가 하는 ‘콩 사오(Không sao)’가 너무 좋았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콩 사오가 참 좋은 면도 있네.”
어떤 일이든 문제이든 장점과 단점이 있는 법이다. 베트남 사람들의 ‘괜찮아요, 콩 사오(Không sao)’ 역시 그렇다. 착한 베트남 사람을 만나서 그 말을 들으면 정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는 것이다.
베트남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천천히(뜨 또 từtừ)”와 “괜찮아요.(콩 사오, Không sao)”다.
‘천천히’는 립 서비스에 가깝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괜찮아요는 실제 그냥 상황을 모면하자는 말이다.
그들이 정말 하기 싫어하는 말은 ‘미안하다(Xin lỗi)’이다. 어지간한 상황에도 그 말은 하지 않는다.
무단결근을 해놓고서 ‘배가 아팠어요(Tôi đau bụng.)’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당연히 하지 않는다. 그다음 날 출근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것을 자존심이라 생각한다. 또 자신이 조금이라도 아는 것은 엄청 전문가인척 한다. 자기가 아는 것에는 설득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똥고집을 부리며 그것을 자존심이라 생각한다.
베트남에 오래 거주한 한국인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존중해 준다. 뻔한 변명과 거짓말을 해도 묵묵히 들어주며 따지지 않는다. 그들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를 한다.
베트남어 신 로이(Xin lỗi)는 영어의 쏘리(Sorry)와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권 사람들의 일상적 언어인 쏘리(Sorry)는 가벼운 실례의 뜻을 담는다. 하지만 베트남어 ‘신로이(Xin lỗi)’는 잘못에 대한 인정을 의미한다. 전쟁 통에 ‘신로이(Xin lỗi)’ 한번 잘못했다가는 목숨이 날아갈 판이기 때문이다.
가끔 정말 미안한 일을 대충 넘기려는 그들을 보면 이상한 자존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자존심은 한국이나 다른 문화권과 다른 개인주의적인 관점이 많다. 남에게 피해를 주었는데도 고개 숙이지 않는 태도가 자존심이라니,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조차도 그들의 문화라니, 받아주는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 베트남에 살면 베트남 문화를 따르는 것이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