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날이 우울하지만은 않는 이유

by 제 이

비가 오는 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지우고 싶었던 그 시간들이 떠올라서 숨이 턱 막히고 어쩐지 기분이 처지는 그런 날이니까.


그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습한 공기와 쏟아지는 빗소리에 숨이 턱 막혔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모두 표정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날이 선 듯한 기운에 차갑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날이 맑았다면 그랬다면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까?


작년 여름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물이 차오르다 못해 발목 넘어까지 물이 고였다. 원래의 계획은 방 안에 틀어박혀 영상을 몰아볼 생각이었지만 그날에는 오빠가 나를 보려고 내려왔었다. 하필이면 골라도 그런 날을 골랐을까? 집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밖으로 나오자 물이 넘쳐 참방거렸다.


약속장소까지 나를 엄마가 데려다주면서 하는 말 역시 무슨 이런 날에 데이트를 하느냐였다. 내가 생각해도 참 웃긴 상황이었다. 터미널에서 오빠를 만나 우선 비를 피해 근처 카페라도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우리는 걸음을 옮겼고, 둘 다 옷이 흠뻑 젖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비에 흠뻑 젖어놓고서 해맑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 상황이 웃겼던 것 같다. 멀리서 내려왔는데 양말이나 바지가 젖은 오빠가 안쓰럽기도 했다. 둘 다 젖은 머리를 털어내면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참 이상하지. 보통은 우울하기만 하던 비가 쏟아지던 그날의 기억은 슬픔보다 웃음이 가득한 것 같다.


또 다른 기억은 모처럼 휴가를 받아 다른 지역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갔을 때였다. 케리어를 끌고서 걸어가는 길은 불편했고, 지하철 안은 에어컨이 틀어져 있음에도 습하기만 했다. 그래도 굉장히 들떠 있었다. 마치 자유를 얻은 듯한 기분에 휩싸여서. 웃음이 마구 나왔다.


한 번은 비가 아주 쏟아지는 날, 해변가에서 동생과 비를 맞으며 달려가던 날의 기억이 있다. 함께 갔던 어른들이 "너희 둘 다 왜 그래?!"하고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져 시원하게 몸이 적셔지는 기분이 시원했고 또 상쾌했다.


평생을 비가 오는 날을 싫어할 거라 생각했지만 더 좋은 기억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을 수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비가 내리는 풍경들을 바라보는 게 싫지 않다.


몽글거리고 따듯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나답게 있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들과 함께했던 기억들 덕분에 비가 내리는 날 우울해지는 순간들이 우울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앞으로도 좋은 기억들이 잔뜩 생겨나겠지? 모든 기억들로 덮여 그 시간의 아픔과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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