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걷기 여행의 주제가 꽃길로 바뀐다. 매화, 산수유를 시작으로 벚꽃, 진달래, 철쭉이 줄줄이 개화하며 여행객을 붙잡는다.
오랜만에 진해를 찾았다. 예전에는 장복산 산행을 겸해서 장복산 조각공원이나 여좌천, 제황산 공원, 경화역 등의 벚꽃을 구경하려 다녔다. 워낙 알려진 곳이라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곳이기 때문에 그 뒤로 잘 가지 않았다. 저장된 앨범 날짜를 보니 2015년이 끝이다.
진해 벚꽃이 만개라는 소식이 뉴스에 나왔다. 토요일 영취산 산행을 계획하고 숙소를 남해 편백 휴양림으로 예약했으니, 내려간 김에 가 보기로 했다.
집을 나선 시각이 새벽 3시경, 아침 식사는 중간 휴게소에서 미리 준비한 샌드위치와 커피로 간단히 해결하고 아침 7시경 진해에 도착하였다. 아직 해가 장복산 너머에 있어서 벚꽃이 제 색깔을 띠지 않았지만 만개가 틀림없었다. 꽃을 찾는 여행을 다니다 보면 피크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다행이었다.
진해가 벚꽃 도시로 유명해진 데는 슬픈 역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군항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벚꽃을 많이 심었다고 한다. 해방 후 일본이 물러가자 일본의 흔적을 없애려 벚나무를 많이 없애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이 알려진 후 1960년대부터 대대적으로 다시 벚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진해 인구가 17만 명 정도인데 벚나무 수가 35만 그루가 넘는다는 이야기를 마침 새벽에 출발하는 차 안에서 라디오로 듣게 되었다. 일본에게 당한 억울함과 분노를 애꿎은 벚나무들이 뒤집어쓴 것이다. 환하게 핀 벚꽃을 보면서, 일본을 연상할 필요가 없으니 충분히 보듬고 사랑하면 되는 게 아닌가.
진해와 마산이 창원시로 합쳐진 것은 창원이 경상남도 도청소재지가 되면서부터 인 걸로 알고 있는데, 고향이 경남인 나한테는 아직은 진해, 마산이란 지명이 익숙하다. 지금은 창원시 진해구라는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왠지 어색하다. 살고 있는 주민들은 괜찮을까. 2010년에 통합된 창원시가 생겼으니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훌쩍 넘었다. 괜히 그곳에 살지 않는 객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진해 벚꽃 명소로는 단연 <여좌천>이다. 여좌천의 주소는 창원시 진해구 여좌동이다. 1.4km에 달하는 여좌천 양쪽 가의 벚꽃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경화역 공원>은 창원시 진해구 진해대로 변이다. 기찻길 양쪽으로 멋지게 핀 벚꽃길이 장관이다. 실제 사용하던 기차도 볼 수 있다.
<장복산 조각공원>은 창원시 진해구 장복산길에 있다. 도로 양쪽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장관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장복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
<제황산 공원>은 창원시 진해구 중원동로에 있다.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벚꽃뿐이 아니라 벚꽃으로 환해진 진해 시가지도 조망할 수 있다.
태백동과 안민동 사이를 잇는 <안민고개>도 벚꽃이 아름다운데, 도로 곁이라 차로 지나가기만 했다.
<해군사관학교>도 벚꽃 명소인데, 군항제 취소로 공개되지 않았다. 예전에 가 본 적 있는데, 군함과 벚꽃과, 해군을 함께 볼 수 있는 이색적인 장소였다.
여좌동 평지마을 주차장에 주차했다. 일찍 도착해서인지 주차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주차장 옆에는 여러 가지 꽃으로 예쁘게 꾸며놓은 카페가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코로나19 상황. 마스크 없이는 모이는 장소에 다니기 힘든 시대다. 창원시에서는 여좌천을 일방통행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잘 지켜지고 있었다. 사진 찍을 때는 잠시 마스크를 벗어도 되겠건만 마스크를 쓴 채로 촬영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을 정도였다.
여좌천에는 12개의 다리가 있다. 제1교인 대천교부터 현녀교, 로망스 다리, 상생교, 인연교, 좌천교, 달비치 다리, 해오름 다리, 나들이교, 여명교, 하늘마루 다리, 12교인 임지교까지. 다리마다 의미를 부여하여 관광객들에게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다리는 로망스 다리인 듯하다. 로망스 드라마가 여좌천에서 촬영된 것이 2002년이었단다. 연인과 사랑에 빠지는 느낌의 행복이 핑크 빛이 아닐까.
우리는 12교인 임지교부터 걸었다. 아직 해가 올라오지 않아 햇빛이 부족하지만 해가 뜨면서 금방 벚꽃 색이 환해진다. 임지교를 건너면 주민들을 위한 맨발 지압로가 있는 산책로가 있고, 여좌천 양쪽 가뿐이 아니라 도로 가에도 벚꽃 천지다. 도로 위에는 벚꽃으로 가득해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구름 한 점 없는 날, 벚꽃 피크를 만났다. 행복한 하루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환한 벚꽃길을 걸으면서 또 하나의 추억을 쌓고 있을 테지. 우리도 이 환한 길을 걸으며 추억을 또 하나 만든다.
나는 사진을 잘 찍지 못한다. 남편은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오랫동안 취미로 사진을 찍어왔다. 걷는 길은 평길이라 좀 낫지만, 산길을 오를 때에도 무거운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풍경 속에 사람 넣어 찍기를 좋아해서 나는 필요할 때 모델만 되어주면 그만이었다. 사실 집으로 돌아와 앨범에 저장해 놓아도 잘 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등산이나 하면 되지 뭘 그렇게 자꾸 찍냐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런 내가 바뀐 건 블로그와 브런치에 여행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길을 걸으며 생각한 것을 뒷받침해 줄 장면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눈으로 보이는 것과 카메라로 보이는 것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또, 내가 원하는 사진과 남편이 찍은 사진 사이에 갭이 생기면서, 드디어는 카메라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이 찍은 것보다는 많이 엉성하고 산만하지만 내가 찍은 사진을 가끔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주로 내가 카메라를 갖다 대면 내가 선택한 자리에서 남편의 감각을 담아 찍어주는 식이다. 이제는 글을 쓰고 사진 편집을 하게 되면서 남편의 사진에 크게 관심을 갖고, 블로그나 브런치에 사진을 올리는 일에 남편도 기분이 꽤 좋은 모양이다.
산행은 아니지만 길을 걷는 것도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일이다. 특히 아름다운 벚꽃이니 함께 걷는 마음은 연한 분홍빛에 절로 물들어 마치 연애 시절의 기분이 들기도 한다.
축제가 취소되어서 덜 복잡하다고 생각했는데, 창원시에서 여좌천 양쪽을 차와 노점상이 없는 거리로 운영하는 모양이다. 3월 25일~4월 4일까지 실시한다는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다. 예전에 주택 쪽 도로 가에 노점상이 다닥다닥 들어차 있어서, 걷기도 힘들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차도 다녔던 것 같고, 거리는 쓰레기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화려한 축제 뒷면의 아픈 모습이랄까. 코로나가 끝나고 축제가 다시 열리게 되더라도 계속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다. 그분들도 먹고살아야 하는 건 맞는데...
여좌천 벚꽃길에서 길을 건너면 진해 내수면 환경 생태공원이 있다. 저수지를 중심으로 뺑 둘러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습지 공원도 볼 만하고, 저수지 옆의 벚꽃도 멋있었던 것이 생각나서 다시 방문했다. 생태공원은 완연한 봄이었다. 튤립, 벚꽃, 연두색 수양버들까지 봄색을 제법 내고 있었다.
저수지 가까이로 갔다가 뜻밖에 멋진 반영을 만났다. 얼마 전에 양평두물머리나루길에서 만났던 데칼코마니 반영이다. 파란 하늘과 푸른 산, 벚나무 색이 더해져 컬러풀하다.
아주 커다란 나무가 저수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수령이 몇 년일까? 오래 살기로 유명한 느티나무인 듯한데 안내판이 없어서 알 수 없었다. 사람의 일평생은 길어봐야 일백 년을 넘기기 어려운데, 나무는 오래 살면 몇 백 년이 거뜬하다. 해마다, 한결같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면서 나이를 먹는 나무다.
생태공원을 나와 여좌천 벚꽃길 걷기를 마무리한다. 아침에는 빛이 부족해서 어두웠는데, 이제 환해졌다. 파란 하늘에 연분홍 벚꽃잎들이 눈에 부시다.
오늘 걸은 거리는 3.9km, 1시간 40분 걸렸다. 주차장에 오니 오전 8시 45분. 이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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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남아 경화역 공원으로 간다. 경화역도 벚꽃 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주차장이 마땅치 않아 경화역 가까운 주택 골목에 주차를 했다.
경화역 주변에 전에 없던 아파트 단지가 생겼다. 2017년에 준공했다고 하니 우리가 다녀간 후에 건축한 모양이다. 벚꽃이 아름다운 경화역을 집에서 볼 수 있는 행운을 잡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겠다.
경화역은 2006년 최종 업무를 중단한 폐역이지만, 가끔 화물 열차가 지나간다고 한다. 경화역사 모형을 만들어 두었는데 사람들이 인증사진을 찍고 있었다. 기차를 배경으로 찍도록 의자를 만들어 놓은 포토존도 있었고, 세워 놓은 기차에 올라가서 찍으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들 기차와 철도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를 즐기고 있었다.
경화역사 모형
경화역에 도착했을 때가 거의 9시쯤. 하늘은 이미 파란 도화지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벚꽃은 어찌나 그리 곱든 지. 사람이 많아 아쉬웠지만 함께 즐겨야지 어쩌겠는가. 우리는 또 다음 행선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