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한테 학교는 호기심 천국이었다. 아버지가 매일 가시는 학교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쯤 되었을까. 요즘 같으면 어린아이 혼자 어디를 돌아다니는 것이 드문 일이겠지만, 60년대 당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어머니는 어린 동생 돌보기와 집안일 때문에 바쁘고, 아버지와 언니, 두 살위의 오빠도 학교에 가고 없었다.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이 어렵지는 않았다. 타박타박 큰길을 따라 곧장 걸어서 가다가, 큰 길가에 길게 뻗어있는 학교 담장을 보았겠지. 차가 다니지 않을 때 재빨리 건널목을 지나고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는 골목길을 따라 정문 앞에 도달했으리라.
그때는 학교 수위(현재의 학교 보안관) 아저씨가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이는 용감하였고 영리했던 모양이다. 보통 건물의 한가운데에 교무실이 있는데, 헤매지도 않고 곧장 교무실을 찾아 들어갔다.
" 김*규 있습니까~"
조그만 꼬마 여자 아이가 교무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와 하는 소리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의 어른이 묻는다.
" 김*규? 왜 찾는데?"
"우리 아버지인데요~"
그러자 교무실 안이 까르르 하하하 웃음바다가 된다. 곧바로 아버지가 호출이 되고 딸은 아버지에게 웃음 섞인 꿀밤 한 대를 선물 받는다. 아니 아마 1원짜리 동전 하나도 선물 받았으리라.
그 뒤로도 몇 번 아버지를 찾아 아이는 학교를 놀러 갔다.
"아버지, 1원만."
아버지는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늘 1원짜리 동전을 준비하셨다가 방문한 딸의 손에 쥐어 주셨다.
" 작은 김*규 또 왔어?"
선생님들 사이에 나의 별명은 작은 김*규였다.
사실 그 당시 동네에 유치원이 없었다. 지금처럼 모든 아이들이 학교 입학 전 교육을 보편적으로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동네 골목에 끼리끼리 모여서 놀이 문화를 즐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에서 특별히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어머니는 4살 터울의 어린 동생 때문에 바쁘니, 꽤 심심했던지 학교 놀러 가는 재미난 놀이를 찾아낸 것이리라.
어머니는 그 뒤 어린 딸의 손에 아버지를 위한 따뜻한 점심 도시락을 들려 보내셨고, 덕분에 나의 학교 방문은 공식적이 되어 버렸다.
그다음 순서는 교실 구경이었다. 이미 선생님들 사이에 작은 김*규로 널리 알려져, 내 얼굴을 모르는 선생님이 없었다.
도시락을 아버지께 전해드리고 1학년 교실을 기웃거리던 나를 몇 번 지켜보시던 선생님이 나를 교실로 불러들여 빈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그 뒤로 나는 6살 청강생이 되어 두 살 위 언니 오빠들과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전에 한글을 깨쳤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받아쓰기 70점이라는 점수가 기억나는 걸 보면 그런대로 수업에 잘 적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여름이 가까워지면서 위생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내 머리에 부스럼이 생겼다. 그 당시에는 그런 병이 흔했나 보다. 어쨌든 그로 인해 내 머리는 이발기로 박박 밀어 민머리가 되었고, 청강생의 신분도 끝이 났다.
다음 해 나는 7살의 나이로 학교에 조기입학 하여 1학년을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딸을 위하여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년 내내 같은 학교에서 내 곁을 지켜주셨다.
중학교 입학 후에야 교감 승진을 위해 준비를 하시고 일정 점수를 취득하신 후에 곧바로 교감으로 승진하셔서 학교를 옮기셨다.
자식이 넷이나 되었지만, 6년 내내 같은 학교에 근무하시려 승진까지 미루신 건지. 특별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딸은 그만큼 효도로 보답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