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학교와 나

내가 교사가 된 이유

아버지를 따라 교사가 되었다.

by 세온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만 18세가 되기도 전에 발령을 받고 교사 생활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실 때까지 45년 이상을 재직하셨다.
내 어린 시절, 당시 유치원은 일반 가정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였을 때다. 내가 살던 소도시에 잘은 모르지만 하나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히 아이들은 입학 전 한글교육이나 여러 가지 선행 학습과 전혀 상관없이, 골목이나 넓은 동네 공터에서 함께 어울려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컸다. 편을 갈라 전쟁놀이도 하고, 자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세월이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는 다른 아이들에게는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내게 특권의 공간이었다. 어머니가 6살짜리 꼬마에게 아버지의 따뜻한 점심을 배달하는 일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보무도 당당히 학교를 휘젓고 다녔고 유치원 대신 학교에서 놀았다.
1년 뒤 나는 그 학교에 조기입학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6년간 아버지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되었다. 나의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과 아버지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퇴직하고 5년이 제일 위험하다는 말이 있는 건, 그때쯤 일을 놓고 난 뒤의 허전함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수명을 단축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추측이 그럴싸한 썰로 회자된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아버지는 5년째 되던 해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아버지가 많이 그립다.

커서 뭐가 될 거니? 우리는 아이들에게 자주 묻는다. 그리고 꿈을 가지라고 한다.
나는 나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요~ 라는 노래를 1학년 때 가르쳤다.

그런데 나는 어린 시절 교사 외에 다른 직업을 꿈꾸어 본 적이 없었다. 많이 조숙했던 건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던 건지, 나는 6학년 때부터 이미 초등학교 교사가 되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이렇다.
'우리 집 형편에 분명히 교대밖에 갈 수 없어. 그러니 나는 학교 선생님이 될 거지.'
우리 집 형편. 할아버지 부재로 인하여 할머니의 삯바느질로 근근이 살아온 가정환경에 일찍부터 자립이 필요했던 아버지는 중, 고등학교 통합 과정이었던 사범학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수업료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가난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기회였으리라.

그렇다고 가난이 쉽게 해소된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이미 가정 형편을 걱정해서, 수업료가 싸고 당시 2년제였던 교육대학 진학을 계산하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언니, 오빠, 동생까지 4남매나 되는 식구 많은 집이 아닌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여곡절 끝에 대학은 서울로 진학하게 되었다. 초등 교사로 발령받고 퇴직하기까지 39년. 아버지보다 5년 이상 적은 경력이지만 아버지를 이어받아 나름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면서, 긴 세월을 초등학교와 함께 살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학교가 나를 키우고 나는 학교를 놀이터 삼아 살아온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놀고 공부하고 생활하였고, 성인이 되어서도 퇴직하기 전 까지는 학교를 떠난 적이 없었다.

30대쯤에 수필 공부를 한참 하던 시절, 소재의 빈곤에 갇힌 적이 있다. 그때는 지금의 블로그나 브런치처럼 다양한 소재로 쉽게 글을 쓰지 못했다. 아이 키우는 이야기나, 교단 이야기는 수필의 소재가 되기 어려운 때였다. 물론 나의 재능이 거기까지였겠지만, 글 쓸 소재가 막혀 버린 바람에 글쓰기를 포기한 셈이다.

학교를 떠난 지 6년째.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곳에 대한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을 느낀다.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이야기, 나의 어린 시절, 중고교 시절, 대학 시절을 포함해서, 초등학교 근무 시절까지 여러 가지 추억이 나의 기억 창고에 쌓여 있다.

그걸 꺼내보려고 '학교와 나'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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