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때의 기억이다. 학교 도서실을 증축하는 바람에 그 많은 책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도서실의 책을 아버지 교실로 옮긴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책을 한 교실로 다 옮긴 것 같지는 않다.
여름방학을 맞은 내게 볼만한 책이 가득 찬 아버지 교실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그때 열심히 읽었던 책들이 SF 소설이 많았다. 몸을 쓰지 않고 머리만 많이 써서 몸은 가늘고 머리는 몸통의 2배 정도로 크게 표현한 외계인의 모습, 하늘을 나는 자동차, 우주정거장, 우주에서 만든 파란색 장미 등이 생각난다. 아마 그때부터 내게 책이 가까운 친구가 된 것 같다.
당시 학교 내에 문방구가 있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문방구가 아니라 학교에서 운영하는 문방구였다. 아버지는 그 문방구 운영을 맡고 계셨다. 자세한 내용은 어려서 잘 모르지만, 상품을 주문하고, 판매 대금을 정산하는 일을 맡으신 듯하다.
문방구 옆에는 급식 빵을 굽는 시설이 있었다. 커다란 오븐에 한판에 20개 정도 되는 식빵을 굽고 계시는 아버지를 자주 볼 수 있었다. 학급 수도 꽤 많은 학교였기 때문에 한 번에 여러 판을 구울 수 있는 큰 규모의 오븐이었다.
당시 핸드볼 코치로도 활동하신 아버지가 방학 동안 선수들 간식으로 특별히 만들어 주셨던 옥수수 식빵 맛이 지금도 기억난다.
아버지는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담임까지 맡으셨으면서 해내신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교사로 근무하면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 외에 맡겨진 한 가지 업무조차도 시간이 부족해서 쩔쩔매기도 했는데...
그 당시에는 운동부 코치를 외부에서 따로 초빙을 하지 않고 일반 교사 중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맡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맡은 팀이 늘 우승하여 특별 대우를 받으셨는지 고향 도시의 두 학교에서만 20년 정도 근무하신 것으로 안다. 그 덕분에 나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아버지 학교의 선생님 자녀로 지낼 수 있었다.
내가 졸업을 하자마자 교감 승진을 위한 준비를 하시고, 얼마 안 있어 교감 발령을 받아 지방으로 가셨던 것은 딸을 위해 얼마나 신경 쓰셨는지 알 만하다.
아버지를 섭섭하게 해 드린 일이 있었는데, 두 딸 중의 하나는 핸드볼 선수로 키우고 싶어 하신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핸드볼 선수는 팔 힘이 강해야 하는데, 내가 던진 공이 멀리 못 가고 바로 앞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기가 차서 웃으시던 기억이 난다. 운동선수시킨다고 왼손잡이를 그냥 두셨는데... 그때만 해도 왼손을 쓰면 부모나 담임이 고치도록 애를 쓰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학교에서의 6년은 나를 아버지와 가깝게 연결한 끈이 되었다. 말씀이 거의 없으셨지만 항상 곁에 가까이 존재함 만으로도 나의 초등 시절의 생활은 든든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초등교사를 하게 된 것이라든지, 화초 가꾸기를 좋아한다든지 하는 일을 생각해 보면 알게 모르게 내게 존재감이 컸던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는 듯하다.
6학년을 맡았을 때 아이들에게 이런 선택과제를 내 준 적이 있다.
- 아버지 직장을 방문해 보고 아버지의 직업에 관한 보고서 써 오기
많은 아이들이 그 과제를 해 온 건 아니지만, 몇몇 아이들이 아버지의 근무지를 방문해 보고 알게 된 점이나 생각을 잘 정리해서 제출했다.
아이들이 자신의 적성이나, 장래 희망이 뭔지 잘 알 수 없을 때 아버지의 직업을 살펴보게 한 것은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해서 교사가 된 건 아니었다. 가정형편상, 그리고 그 당시의 선택지 부족으로 밀리듯 택한 직업이지만,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택했고, 그 직업이 내게 천직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성격이나 적성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을 수도 있는 일이고, 무엇보다 돈만 벌어주는 아버지가 아닌, 직장에서 아버지의 하는 일이나 역할에 대한 가치를 아이가 알아주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