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는 늘 여행지였다. 고향은 남쪽 지방이고 서울에 산 지는 40년이 넘었다. 아는 친척도 없고, 가까운 친구도 없었으니 예전의 강원도는 멀기만 한 곳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여행에 맛을 들여 주말마다 유명 관광지를 찾아다녔다. 수순이랄까 우연히 등산을 시작한 것이 이제는 매주 산행으로 바뀌었고, 직장을 퇴직하고 나서는 산행기나 걷기길 여행기를 블로그에 올리는 취미 생활로 발전하는 동안 산이 많고 좋은 걷기길이 있는 강원도는 시나브로 나와 가까워졌다. 고속도로가 뚫리고, KTX까지 연결된 것도 한몫한 셈이다. 이제는 강원도 가자고 하면 부담 없이 따라나선다. 구곡폭포는 데이트 시절 겨울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폭포 가까이까지 갈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는 길이 얼음길이라 입구에서 아이젠을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겨울 구곡폭포는 빙벽 타기의 명소였던 모양으로 자일을 타고 빙벽을 오르던 사람들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남편이 겨울 구곡폭포에 가자고 했을 때 빙벽 타는 사림들을 구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안전 문제로 금지하고 있어서 볼 수 없었다. 제주에 올레길이 있듯이 춘천에는 봄내길이 있다. 4코스인 의암호 나들길에는 예전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모두 8코스까지 있다고 한다. 이번 구곡폭포와 연계된 봄내길은 2코스 물깨말 구구리길이다. 물깨말은 강촌의 우리말 이름인데 물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구구리길은 아홉 구비로 돌아 흐르는 구곡폭포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물깨말 구구리길. 참 다정한 우리말이다. 구곡폭포는 춘천시 남산면 강촌에 있었다. 입구에서 구곡폭포까지는 약 20분 정도 걸으면 된다. 넓은 포장도로라 길이 편했다.
구곡폭포 가는 길에 9가지 글자판을 세워 놓았다. 쌍기역으로 시작하는 글자 9개를 찾아다니느라 걷는 길이 더욱 재미있었다. 글자마다 붙여놓은 뜻이 담긴 글귀가 인상적이다. 꿈 - 희망을 찾아서 끼 - 재능의 발견 꾀 - 일을 잘 해결하는 지혜 깡 - 마음에서 솟구치는 용기 꾼 - 한 분야의 최고봉 끈 - 삶 속에서 맺어지는 관계 꼴 -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모습 깔 - 빛깔이나 맵시가 곱고 산뜻함 끝 - 여정의 끝은 새로운 시작 나는 개인적으로 '끝'에 대한 내용이 제일 좋았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직장에서 은퇴하여 끝이 났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 제2의 인생 - 새로운 시작이 아닌가. 우리의 새로운 여정은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구곡폭포는 여전하였지만 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이젠이 필요하던 얼음길은 나무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어서 구두 신고 온 관광객이 있을 정도였다.
옛 추억을 생각하며 구곡폭포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깔딱고개(깔덕고개라고 부른다고 한다.)를 넘어갈 차례다. 오르막은 늘 힘들다. 스틱에 의지하며 힘들게 걸어가는데, 비닐봉지를 들고 내려오는 부부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동네 주민인 모양이다. 관광지라 아무래도 쓰레기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깨끗한 길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일 운동 겸 봉사를 하는 것 같았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답게 표정도 목소리도 밝았다.
20분 정도 걸어가니 그야말로 고개를 넘어간다. 힘은 좀 들지만 20분 걸어 올라왔는데, 고개를 넘어 5분 정도 걸으니까 문배 마을이 바로 나온다. 꽤 높은 지역의 마을인 셈이다. 예전에 화전민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 지금까지 존속되어 온 모양이다. 예전에도 이 길이 있었을까. 장이라도 볼라치면 지게나 봇짐으로 물건을 지고 날랐을 텐데, 배낭에 스틱을 잡고도 헉헉대는 우리가 무안해진다.
고갯마루에 있는 마을 안내 게시판이 참 정답다. 김가네, 이 씨네, 장 씨네 등등. 전화번호까지 있는데 아마 대부분 음식점인가 보다. 예전에 빙벽 타기가 성행할 때, 그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식당이었던 모양인데 이제는 걷기 여행객들의 쉼터가 되었으리라.
마을을 지나가는데, 한 식당 창가에 예쁜 제라늄 화분이 줄을 지어 있다. 햇볕이 참 잘 드는 듯하다. 문 열고 들어가 구경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식사할 것도 아니면서 귀찮게 할 수는 없었다. 마을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작고 아담하다. 한 10여 가구쯤 될까. 이 마을에선 누구네 집에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지 서로 잘 알 것 같다. 마을 앞에 문배 마을 생태 연못이 있어서 그곳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기로 하고 배낭을 풀었다. 연못을 뺑 둘러 세운 울타리에 벤치가 줄줄이 붙어 있다. 마을 주민들의 배려심이 엿보인다.
따로 테이블이 있었지만 분위기 있게 연못 옆 벤치에 자리 잡았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더니 어르신 한 분이 연못가를 걷고 있었다. 말을 붙이고 싶었으나 간단히 '안녕하세요' 정도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여행지를 다니다 보면 그곳은 우리에게 일종의 작품이 그려진 캔버스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우리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조용 말하고 조심조심 움직이며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애쓰며 다닌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지만, 가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때가 많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가 제일 즐거우며, 어떤 일을 하고 지내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하여 오늘을 잘 살고 있는지 등의 스토리를 듣고 싶은 것이다. 마을마다 집이 있고, 그 집집마다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의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갈 시간들이 역사로 이루어질 텐데, 지나는 객들은 그저 보이는 풍경 속에 마을이 있고 사람이 있구나 하고 지나치는 것이다.
물론 오지랖이 넓어서 같이 다니는 여행객 끼리도 친구가 되고, 여행지 주민과도 친구가 되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그런 변죽 좋은 사람들은 못 되어 미술관 명화 앞의 관람객처럼 조용히 조심스럽게 지나고 만다.
마을 길을 지나 또 고개를 하나 넘으면 약 5km 정도의 임도가 구곡폭포 입구까지 연결된다. 구곡폭포에서 깔딱고개로 넘어오면 30분도 안 걸리는 거리가 우리 걸음으로 2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가 되는 것이니 그 고개가 힘은 좀 들어도 얼마나 소중한 곳일지 짐작이 간다. 요즘은 시골도 집집마다 차 없는 집이 거의 없다는데, 문배 마을에도 주차된 자동차를 꽤 보았고, 길에서 지나가는 자동차를 만나기도 했다. 다행인 일이다. 이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깔덕 고개를 오르내릴 일은 없겠지.
고개가 높은 것은 맞다. 하지만 넘을 수 있으니까 고개가 아닌가. 사람이 살다 보면 고비를 만날 때가 있다. 병마든, 사고든, 뜻하지 않은 이별이든 어려움으로 견디기 힘들 때, 넘을 수 있는 고개라 여기고 이겨 내야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하지 않던가. 구구리길 문배마을이 화전민으로 살던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평화로운 마을을 이루고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듯이 코로나도, 코로나로 인한 모든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