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애매한 날씨가 된다. 보통 추석이 9월~10월 초에 있게 되는데, 이번에는 9월 10일이 추석이었으니 상당히 추석이 빠른 편이다.
추석 직전 남쪽 지방을 강타한 태풍 때문에 농산물에 큰 피해를 주었고, 추석 채소값이 엄청나게 뛰었다. 한단에 9,000원이 넘는 시금치에, 배추 3포기 묶음이 4만 원을 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시금치는 할 수 없이 샀지만, 추석 김치 담는 일은 포기했다.
또다시 태풍 소식이 들려온다. 이번에 또 얼마나 많은 비와 강풍으로 피해를 줄지 모르겠다. 태풍이 밀어낸 덥고 습한 공기가 우리나라에 미리 쳐들어왔다. 우리가 불갑산 산행을 한 9월 17일 토요일은 낮 기온이 30도를 넘는 한 여름 날씨였다.
영광 불갑사 꽃무릇 군락지는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그만큼 유명한 곳인 데다가, 축제 시작 바로 다음날이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새벽 3시쯤에 서울을 출발하였다.
"자지 말라는 거네."
올빼미족이라 늦게 잠드는 나에게 새벽 2시 기상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전날 미리 준비한 도시락에 밥만 새로 하여 담은 다음 바로 출발. 불갑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6시 30분이다. 아직 주차장은 여유가 있어서 차를 대고, 가장 부실한 식사인 빵조각으로 아침을 때웠다.
새벽인데도 여기저기 사람들이 많다. 자세히 보니 너도나도 무거운 카메라를 하나씩 들고 빨간 꽃길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꽃 축제장에 가장 먼저 들이닥친다는 사진작가 행렬이다. 멋진 분위기가 나는 옷을 입은 여인도 눈이 띤다. 전속 모델이다. 지루한지 왔다 갔다 걸으니까,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어!"
라는 고함 소리가 들린다. 한 장의 멋진 사진을 위해서 몇 시간이고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는 사진작가들의 노고를 안다. 그녀는 그들을 위한 멋진 정물이어야 했다. 나 같으면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모델인지 한복을 차려입은 여인네도 있었다. 빨간 꽃무릇과 옅은 색 고운 한복이 꽤 어울렸다.
우리는 산행이 목적이다. 덤으로 꽃을 찍기 위해 무게 나가는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대부분 등산객들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남편이 무거운 카메라가 부담이 되었는지 좀 더 가벼운 카메라를 새로 샀는데, 생각보다 가볍지 않고(100g 차이란다.) 익숙하지 않아 다루기가 힘든 모양이다. 산행 중에 찍은 사진의 꽤 많은 부분이 화질이 엉망으로 나왔다. 중간에 설정이 잘못된 모양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찍은 사진은 또 괜찮았기 때문이다. 결국 할 수 없이 많은 사진을 쓰지 않기로 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우리 일상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새벽에 사진작가들이 몰리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한다. 빛이 너무 밝으면 자연 색상이 잘 표현이 안 된다고 한다. 예전에 비 오는 날 6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앨범 사진을 찍으러 야외로 나간 적 있는데, 그때 사진 기사가 비 오는 날이 사진이 더 잘 나온다고 걱정하는 나에게 말한 적 있다. 그 사실을 이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새벽 날씨는 잔뜩 흐림이었다. 어두워 앞 쪽 사진은 거의 쓸 수가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색상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낮에는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맑은 날씨였는데, 나중에 찍은 사진은 광선이 너무 강해서인지 자연스럽지 못한 색상으로 표현되었다. 사람만 눈을 제대로 못 뜨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도 그런 모양이다.
이번에는 나도 휴대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가입한 카페에 불갑사 방문 게시글을 올리는데, 앞쪽 사진과 뒤에 찍은 사진의 색상이 확실히 달랐다.
< 제22회 영광 불갑산 상사화 축제>는 9월 16일부터 9월 25일까지 열린다. 어떤 곳은 아직 제대로 피지도 않았는데도 꽃 축제를 하는 곳이 있는데, 여기는 축제일부터 이미 만개 상태라 참 좋았다.
사진작가들이 모여있다.
꽃무릇을 이곳 영광에서는 상사화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사화는 연한 분홍색이며, 가끔 노랑상사화도 볼 수 있는데, 꽃 모양이 꽃무릇과 다르다. 꽃 모양도 수선화와 비슷하다.
꽃무릇도 뜻으로 따지면 상사화다. 잎이 꽃을 못 보고, 꽃이 잎을 못 보는. 그래서 남녀 간의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을 뜻하는 꽃이다.
영광군에서 제공하는 상사화의 전설을 간추려 옮겨본다.
옛날 돌아가신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며 백 일간 탑돌이를 하는 여인에게 그 절의 큰스님 수발승이 연모의 정을 품었으나, 스님의 신분이라 표현하지 못하고 상사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이듬해 스님의 무덤에 잎이 진 후 꽃이 피어난 것이 이 꽃무릇이라 꽃의 이름을 상사화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꽃색은 진한 빨간색이며, 6장의 피침꼴 꽃잎은 뒤로 말리고 수술이 꽃잎보다 훨씬 길어 꽃 밖으로 길게 뻗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석산이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은 옛날 가난한 백성들의 구황식품이기도 했다고 한다. 알뿌리에 함유된 녹말을 걸러내 죽을 끓여먹었는데, 알뿌리에 독소가 있어 오래 가라앉힌 후 먹어야 했다고 한다. 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죽을 쑤어먹고 배탈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는 안내가 있었다.
남쪽 지방이라 단풍이 들려면 아직 한두 달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나무들은 푸른빛을 그대로인데, 나무 아래 꽃밭은 온통 붉은빛이다. 무리 지어 핀 꽃 군락지를 한두 번 본 것은 아니지만, 온통 붉은 천지를 만든 꽃무릇의 빛깔과 초록이 그대로인 나뭇잎의 대조가 마치 여름의 크리스마스 기분을 느끼게 한다. 축제다.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강렬한 보색 대비다. 잎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붉은빛을 강조한다. 연두색에 가까운 줄기 색 때문에 그나마 진정이 된다고 할까. 줄기의 높이가 거의 같은 것도 특징이다. 붉은색 꽃무릇 융단은 그래서 가능해지는 것 같다.
불갑저수지의 반영과 꽃무릇의 어울림이 멋지다.
뜻밖에 금빛 비단잉어가 물살을 가르며 우리 가까이로 왔다.
빛이 좀 더 밝았으면 했다. 하지만 사진작가들처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서 우리는 산을 올랐다. 내려오면서 다시 보면 되니까.
그런데, 뜻밖이었다. 예전에 산행을 했을 때와 확실히 달랐다. 동백골 쪽으로 오르는데, 곳곳에 꽃무릇 천지였다. 올라가는데 등산로 양쪽으로 온통 꽃이었다. 꽃 군락지를 벗어나면 거의 꽃을 보기 힘들었던 예전과 달리, 꽤 높은 곳까지 꽃무릇이 피어있는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오르막이 약간 심한 편이고, 골짜기라 바람이 불지 않아 꽤 더워서 산행의 쾌적함이 떨어지는 편인데도, 야! 멋지다! 를 반복하면서 즐겁게 산을 올랐다. 산 중턱에 있는 해불암 가까이까지도 꽃무릇의 행렬은 계속되었다. 생각지도 않던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108 가지 번뇌를 버리고 올라가라는 108 계단을 지나면 연실봉 정상이다.
불갑산 정상인 연실봉에 오를 때까지도 하늘은 온통 회빛이었다. 파란 하늘은 없었지만, 멋진 능선에 눈 한 번 주고. 이른 시간이었지만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많아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연실봉 정상은 넓은 편이 아니다.
야생화는 더 찍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자꾸 눈에 밟힌다. 오늘은 꽃무릇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먹었는데도, 흰 물봉선, 단풍취 등등에 눈이 간다. 찍어놓고 올리지 않은 야생화가 많다.
다시 내리막길이다. 구수재에 가까울수록 등산객 수가 많아진다. 꽃무릇의 개체수도 차츰 증가한다. 상당히 완만한 편이라, 내년에 다시 오게 된다면 구수재로 올라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쪽 방향이 확 틔어 있어 제법 선선한 바람도 불었다.
햇빛이 강해졌는지, 꽃무릇 색감이 달라졌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호랑이를 잡은 곳이 여기 불갑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호랑이 생태공원도 조성되어 있었다.
다시 저수지로 내려왔다. 이미 관광객들로 유원지 느낌이다. 게다가 쏟아지는 햇빛이 너무 강해서 즐기며 여유 있게 걷기가 어려워졌다.
불갑사도 때마침 열리고 있던 법회의 염불 소리와 절 마당에 가득한 관광객들의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이미 고즈넉한 절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예쁜 꽃무릇 꽃길을 한 번 더 걸어보고 싶었지만, 쏟아지는 햇빛과 많은 인파 사이를 헤치고 다닐 마음이 사라져서, 차 다니는 도로로 발 빠르게 걸어 나왔다.
전처럼 탑원이라는 건물 옆 그늘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은 시각이 11시. 12시가 되기 전에 주차장을 빠져나왔지만 약간의 정체는 피할 수 없었다.
11시가 넘었는데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차량의 행렬. 어디서부터 걸어오는지 수많은 인파. 지나가는 길에 대기 번호 순서를 부르는 식당 종업원의 목소리에 웃었다. 한때이겠지만, '아, 축제의 한가운데에서 우리가 빠져나가는 중이었구나.'를 느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몇 대인지 세어볼 걸 그랬다."
한쪽 도로를 주차장인 양 줄 서서 있는 버스가 몇 대인지 모르겠다. 주차비도 없고, 입장료도 없는 착한 축제라고 남편이 일러준다. 예쁜 꽃을 함께 즐기려는 따뜻한 마음씨의 영광군 불갑면이, 덕분에 장사가 잘 되어서 부자 되었으면 좋겠다.
내년에는 선운사 꽃무릇 트레킹을 가 볼까 생각 중이지만, 화려한 불갑사의 꽃무릇 축제 한 마당에 그 붉은 꽃밭에 마음을 담그고 싶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많은 인파, 복잡한 교통) 다시 불갑사 꽃무릇 구경 가자고 조를지 모르겠다.
불갑사 꽃무릇 군락지는 그 자체로 축제다. 가슴 떨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