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불갑산 꽃무릇 피크에 산행을 다녀왔다. 아직 민둥산은 준비가 안 되었단다. 잠깐 궁리를 하다가 내년에 가려고 마음먹었던 선운산 트레킹을 가기로 했다.
선운산은 우리가 자주 찾는 산이다. 주로 늦가을이나 겨울 산행을 많이 했다. 세어보니 이번까지 16번이다. 꽃무릇 여행은 아직 산행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인 2005년 관광객 버전으로 다녀온 것 한 번뿐이다.
불갑사와 함께 선운사도 아주 유명한 꽃무릇 여행지다. 그럼에도 꽃무릇을 보러 주로 불갑사를 다녔다. 단풍이 아름다운 선운사 도솔천을 보러 11월 여행으로 자주 찾은 바람에 꽃무릇 여행은 뒤로 밀린 듯하다.
시기는 양쪽이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선운사 일주문 주변의 군락지에는 꽃이 많이 남아있는 반면에, 산속에는 거의 지고 있는 중이었다. 불갑사는 이번에 가도 산속의 꽃무릇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꽃무릇은 잎이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이 잎을 보지 못하는 상사의 꽃이다. 꽃말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불갑사의 상사화 전설을 보면 절에 불공을 드리러 온 처자를 사랑한 큰 스님의 수발승 이야기가 나온다. 선운사 꽃무릇도 비슷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아주 오래전, 스님을 짝사랑하던 여인이 상사병에 걸려 죽은 후, 그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다는 이야기와, 절집을 찾은 아리따운 처녀에 반한 젊은 스님이 짝사랑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피를 토하고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단다.(출처 : 대한민국 대표 꽃길)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가슴은 터질 듯한 고통이 심장을 누르는 법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지독하고 힘든 사랑을 하는 꽃이다. 그렇다. 꽃무릇의 빛깔은 피를 닮았다. 무리 지어 피어있는 꽃무릇의 붉은빛 풍경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름다움에 숨이 막힌다. 띄엄띄엄 피어있는 꽃도 상처에서 떨어진 핏자국 같은 느낌이 들어 다시 돌아보게 된다.
꽃의 의미가 어떻든 꽃무릇은 특별하게 아름답다. 구부러진 꽃잎은 화려한 드레스를 연상하게 한다. 꽃잎보다 긴 수술은 아름답게 화장한 속눈썹 길게 붙인 여인의 모습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빨간색 왕관의 모습이기도 하다. 상사병에 병든 여인이나 스님을 연상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온갖 장식으로 최선을 다해 꾸민 여인의 화려한 모습이다. 연두색 줄기 부분은 가녀린 여인의 날씬한 몸매같이 미끈하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도립공원 관리사무소 부근 화단에도 온통 붉은색이다. 우리 민족이 흰색을 좋아하는 백의민족이라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못지않게 붉은색도 많이 좋아한다. 88 올림픽에서 붉은 악마 응원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인 것 같다. 붉은색의 의미를 긍정적인 것만 찾아보면(부정적인 의미도 꽤 있다.) 열정적인 사랑, 생명, 승리, 권위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기쁨, 즐거움, 경사 등의 의미로 많이 쓰이기도 한다.
선운산을 찾을 때마다 꼭 잔디밭의 전경을 찍는 습관이 있다. 탁 트인 잔디밭이 시원하고, 하늘도 더 넓게 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하늘에 구름이 한몫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붉은 정열의 빛깔을 따라 한 발짝씩 안으로 들어간다.
감나무의 붉은 감이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중. 그래도 꽃무릇 필 때쯤은 여름도 가기 싫어하며 떼를 부리는 중이다. 아직은 조금 덥다.
일주문 주변 넓은 터에 꽃무릇 군락지를 크게 조성하였다.
일주문
도솔천을 끼고 무장애길이 조성되어 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길보다는 나는 이 길이 더 좋다.
녹색 나무들이 있는 공간을 걷는 느낌이 좋다. 피톤치드 이런 것 생각하지 않아도 그저 푸른 숲이 만들어준 풍경 속에 빠져들 수 있다는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도솔천과 더불어 극락교는 사진작가들이 선호하는 장소다. 우리도 가을에 오면 단풍과 함께 자주 카메라에 담는 곳이다. 이번에는 꽃무릇과 함께 찍어보았다.
극락교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시다. 무장애데크길 가 여기저기 붉은색 꽃무릇이 햇빛에 더욱 진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숲길로 들어선다. 짙은 붉은색 유혹에 잠시 흔들리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비슷한 바위가 마치 암괴류처럼 흘러내린 모습이 신기하다. 큰 암석이 작게 부서져 굴러내려 온 것일까. 원래 다 한 덩어리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작품이리라. 보닛을 쓰고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모습을 닮았다.
숲 안의 꽃은 지는 중인 듯, 붉은색이 약하다.
미륵바우에 정성을 다하면 병이 낫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겨울에 오면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조릿대 숲이다. 여름에 겨울을 생각하고, 겨울에 여름을 생각하는 놀이를 가끔 한다.
도로의 붉은빛이 예뻐 보여서 건너가 보았다. 길을 따라 꽃무릇이 줄을 서서 피어있다.
하늘의 구름이 좀 더 가벼워졌다.
구부러진 꽃잎은 다른 꽃에서 보기 힘든 흔하지 않은 모양이다. 꽃잎보다 길게 뻗은 수술도 꽃무릇 특유의 멋스러움을 보여준다. 머리에 썼으면 좋을 것 같은 왕관 모양이다. 공주가 공식 행사에 썼던 작은 왕관을 티아라라고 한다는데, 티아라의 모양이 이럴 것 같다.
도솔암 찻집은 기와와 장독과 천연 염색 옷감이 어우러져 전통의 느낌을 강하게 드러낸다.
천마봉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다. 계단이 꽤 긴 편인데, 정상으로 가는 최단 코스다.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에겐 악! 소리가 나는 곳이다
하늘에 구름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가을에 들어서는 요즘, 하늘이 정말 예쁘다.
올라가면서 보이는 천마봉의 모습이다.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모습이지만, 올라가면 생각보다 넓은 편이다.
정상석 인증 사진을 찍는데, 하늘이 멋지다.
천마봉 정상석
낙조대에서 한 번도 석양을 보지 못하였다. 멋질 것 같다.
낙조대
별로 높지 않은 바위인데, 20년쯤 전에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에서 최상궁이 뛰어내린 절벽으로 변신한 곳이다. 촬영과 편집 기술이 더해졌으리라. 예전에 있던 드라마 촬영 안내판은 없어졌다. 썩 좋은 내용이 아니라 치워버린 모양이다. 어쨌든 볼 때마다 신기하다.
등산로 옆이긴 하지만 쉼터로 잘 사용하던 곳이다. 산에 이런 시설이 있으면 참 편하다. 벤치나 정자라도 발견하게 되면 고급 호텔에 든 기분이 된다.
산행할 때 우리는 주로 천마봉에서 소리재 - 참당암 코스로 내려오거나, 더 올라가서 수리봉 - 마이재 쪽으로 산행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소리재 쪽으로 가지 않고 용문굴 쪽으로 내려오는 최단 코스를 택했다. 트래킹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편한 코스다. 그래도 정상으로 올라갈 때나, 용문굴을 지나갈 때는 스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용문굴은 선사시대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을까 싶은 곳이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쉴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심지어 평상만 놓으면 잠자리도 가능한 동굴집이 될 것 같은 곳도 여기저기 있다.
용문굴
대장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돌무더기가 장금이 어머니의 무덤으로 촬영된 곳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드라마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꼭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간다.
각도가 오묘한 기적을 만들어낸 바위다. 작은 편 같은 돌조각이 흘러내리지도 않고 잘 붙어있다. 누군가 처음 발견한 사람을 따라 그다음 사람들도 하나씩 붙여 올린 것이 무슨 설치 미술처럼 자리하고 있다.
용문굴 주변에는 큰 암석 지형이다. 암석으로 된 계곡을 걷는 기분이 색다르다.
넝쿨 식물의 미술 작품이다. 커다란 바위에 녹색 머리카락을 심어놓은 듯, 멋지게 늘어져있다.
예전에는 여인들이 똬리를 머리에 얹고 그 위에 짐을 넣은 무거운 광주리나 물동이 같은 것을 이고 다니곤 했다. 나도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똬리를 만들어 머리에 얹고 이불 보따리 같은 큰 물건을 머리에 이는 놀이를 한 것이 기억이 난다.
똬리를 머리에 얹고 있는 옛 여인의 모습을 또 누군가가 작품으로 만들었다. 한복 치마의 맵시가 그럴듯하다.
천연기념물 354호인 장사송은 수령이 약 600년이다. 진흥굴은 신라 진흥왕이 수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굴이다.
장사송
진흥굴
이곳에도 연리목이 있었다. 시작은 분명히 두 그루인데 한 몸으로 합쳐진 연리목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의미한다.
단풍잎과 어울린 꽃무릇 무리. 지금은 초록과 빨강이지만, 11월 초가 되면 꽃무릇은 없어지고, 멋진 단풍이 이곳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테지. 그때가 되면 확인하러 다시 와 봐야겠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숲길. 선운사 길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도솔천 가의 단풍들도 가을 축제를 준비하고 있으리라. 지금은 초록이지만 두고 보라, 얼마나 화려한 색깔로 이 세상을 온통 뒤바꿔 놓는지.
꽃무릇과 흰 고마리가 도솔천과 어울려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어느새 파란 하늘이 선운사의 배경이 되었다. 내 생각이지만 파란 하늘색이야말로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아름다운 색이 아닐까 싶다.
큰 행사가 있는지 절 마당에 사람들이 많았다.
오전과 달리 햇빛을 잔뜩 받은 꽃무릇 군락지가 더 진한 색으로 감동을 준다. 하늘의 구름은 역시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너도 나도 카메라나 휴대폰으로 이 아름다운 모습을 촬영하느라 바쁘다.
플래카드를 보지 못해서 축제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는데, 광장에서 농악 공연을 하고 있었다. 빨강, 노랑, 파랑, 연두, 흰색의 화려한 색상의 농악 놀이 복장은 색깔 그 자체로 이미 축제의 장이 된다. 신나는 우리 장단의 징, 장구, 북, 꽹과리, 날라리 등이 한바탕 마당놀이를 하는 동안 사자 한 마리가 어슬렁대더니 카메라를 향해 어흥! 하고 제스처를 취한다.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연기를 하려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관광객들에게 서비스를 잊지 않는 쇼맨십을 보여준다.
선운산 10km, 4시간 20분간의 트레킹을 했다. 꽃무릇을 한 번 더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숲길도 좋았고, 하늘은 더 좋았다. 구름이 그림을 그리는 솜씨에 감탄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