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소박한 사치

제주 한달살기의 즐거움

by 도리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제주만 자주가요? 그렇게 가도 또 할 게 있어요?”

나로 말하자면 제주 한달살기 7번, 두달살기 1번 세달살기 1번을 거쳐온 사람으로서 한달살기로는 제법 고인물 축에 속한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이다. 한 놈만 패는 영화 속의 누구처럼 제주만 반복해서 가는 내가 어떤 사람들은 신기한가보다. 그정도로 갔으면 볼 거 다 보고 겪을 거 다 겪었을 것 아니니 다른 곳도 좀 가보는 게 어떻겠냐는 충고도 들었다.

처음 내가 제주를 찾았던 것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이었다. 난생 처음 타본 비행기로 도착한 제주는 떠들썩한 친구들의 목소리, 갑자기 오랜 시간 걸은 탓에 놀라버린 종아리 근육의 통증, 그리고 삼성 자동카메라로 찍은 몇 장의 사진 정도로 남아있다. 사진 속의 나는 성산일출봉, 산굼부리, 천지연폭포 같은 관광명소 앞에서 친구들과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하며 웃고 있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제주였다.

나의 두번째 제주는 대학 때 친구와 함께한 패키지 여행이었다. 우리는 관광가이드가 전략적으로 짜놓은 쇼핑 코스 같은 것을 멋대로 건너 뛰고서는 우리끼리 버스를 타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그랬다. 패키지 여행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했을 때였다. 그러나 고맙게도 가이드는 우리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둬주었고 그 덕에 어렵게 물어물어 찾아가봤던 김영갑 갤러리에서 느낀 감동, 전혀 모르고 들어갔던 식당의 맛있는 두루치기 같은 것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제주는 갈 때마다 나에게 뭔가를 남겨주기는 했던 것 같다)

그후로 오랫동안 나는 제주로부터 멀어졌다. 처음으로 여권을 갖게 된 후로부터 몇번의 해외여행을 간간이 다니는 동안 제주는 나의 선택지에 없었다. 이미 가봤으니까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이국적인 풍경과 외국 냄새, 사진찍기 좋은, 다시 말해 자랑하기 좋은 유명관광지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여행지로서의 제주를 다시 떠올린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나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첫째가 돌이 되었을 무렵, 발리에 갔다가 낮에는 관광지를 다니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느라 기진맥진하는 일정을 반복한 뒤로 나는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외국 여행을 절대로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다시 찾은 제주는 해외여행의 대체제였던 셈이다. 나는 플랜A가 아닌 플랜B, 1군이 아닌 2군,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제주를 다시 찾았다.

나는 중문에 있는 호텔에 숙소를 잡고 한겨울에도 더운물이 채워지는 수영장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수영장이 지겨워지면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관광지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첫 여행에서는 아이가 하나였는데 몇번인가 더 제주를 찾는 동안 아이가 둘이 되고 셋이 되는 바람에 날개옷을 빼앗긴 선녀마냥 휴가철마다 김포-제주 노선에 갇혀버린 처지가 되었다.

호텔은 고급스러웠고 수영장도 따뜻했으니 어린아이를 둔 엄마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여행이 나를 위한 여행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이들 수발을 들기에 조금 더 편리했을뿐이지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일정에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여행들이었다. 30대 여성이 테디베어나 동물 체험에 무슨 특별한 감흥이 있을 것이며 맵지 않고 짜지 않고 질기지 않은 음식들, 다시 말해 아이들이 먹기 좋은 음식이 최우선으로 고려되는 식단이 뭐 그리 좋을 일이었을까. 나는 게다가 수영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일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영장은 그저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소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제주를 새롭게 만난 것은 제주로 이사를 온 친구의 집에 놀러왔을 때였다. 나는 친구의 집에서 자고 친구집 부엌살림을 갖고 집밥을 해먹은 후에 안개가 가득한 사려니숲길을 걸었다. 짧은 여행으로는 해볼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심심하고 밋밋한 일정이었다. 그 전 같았으면 평범한 음식을 내 손으로 해먹고 안개로 뒤덮여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숲길을 걸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어진 시간을 특별한 경험으로 채워야 한다는 여행자의 조급함이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 두지를 않았을테니 말이다.

얼떨결에 도민의 라이프스타일을 흉내내어본 나는 별거 아닌 일을 굳이 제주까지 와서 하는 이 새로운 종류의 사치가 무척 맘에 들었다. 놀이공원에 연간이용권을 끊고 다녔을 때 느꼈던 느낌과 비슷했다. 어쩌다가 큰 맘먹고 하루짜리 이용권을 사서 들어가는 놀이공원에서는 여유를 부릴 수가 없기 마련이다. 정해진 시간안에 놀이기구를 최대한 많이 타야한다는 부담을 안고 이리저리 사람속에서 휩쓸리다가 허겁지겁 짜장면이나 돈까스를 먹고 또 다시 긴 줄의 끝에서 끝으로 옮겨다니다가 집에 오면 그렇게나 피곤했다. 그런데 연간이용권을 끊고 난 후로는 지금 당장 뽕을 뽑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내킬 때 와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서두를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행하는 자잘한 시행착오에 대해서도 관대해졌고 아이들의 그 모든 오만가지 시간낭비에도 너그러워졌다. 제주에 와서 느긋하게 지내는 동안 그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여유로움을 다시 느낀 듯 했다.

마침 친구가 살고 있는 주택단지에는 십 여 채의 한달살기집이 운영되고 있다는 게 아닌가. 여행자의 조급함이 새로운 목표를 발견힌 순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당장 예약을 해버렸다. 그 때 나에게는 숙소비용이 제주 월간이용권처럼 느껴졌다. 제주 한달 이용권이 백만원대면 해 볼만한 딜 아닌가. 그리하여 2017년 12월, 나는 10살, 9살, 7살이 된 세 아이들을 데리고 귤밭으로 둘러싸인 2층짜리 작은 집에서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 여름에 한 번 더, 바로 이어 같은 해 겨울에 또 한 번 더, 그러다가 지금까지 매년 제주를 찾는 중이다.

내가 하는 한달살기에는 특별한 일정이 별로 없다. 종종 한라산에 올라가거나 하는 이벤트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매일매일은 집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주에서도 나는 여전히 밥을 지어서 나와 아이들을 먹이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집안을 정돈한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마저도 집에서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매일 해야하는 일들 사이에 제주가 불쑥불쑥 끼어들어 한층 근사하고 여유로워진 하루하루를 만들어 준다. 저녁거리를 사러가는 길에 마주하는 연보랏빛 노을,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도서관, 가벼운 마음으로 오른 오름에서 바라보는 풍경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제주가 갖고 있는 절묘한 거리감도 나에게는 매력적이었다. 요즘은 외국에서 한달살기 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고 나도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다. 완전히 낯선 곳에서 한달을 보내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멀리까지 오가는 시간, 또 적응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가게 될테니 아무래도 아까운 생각이 든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하는 장기여행에서는 병원을 이용한 일이 한번은 생기기 마련인데 그 부분에 대한 걱정도 컸다. 외국 여행 중에 몇 번 병원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국내 의료진과 의료보험의 강 같은 은혜와 평화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병원을 이용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못미더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나는 여전히 외국이 아닌 제주로 향한다.

반면에 제주가 마냥 가깝지도 않아서 오갈 때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하는 상징적, 물리적인 절차가 있다는 것도 나에게는 좋았다. 공항에 내려서 야자수 사이에 있는 돌하르방을 지나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나는 제주 버전의 어떤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나는 이런 분리감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좋고 나쁜 기억이 묻어있는 공간과 사람을 떠나 한달을 지내며 자연스럽게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고마운 의식이다.

제주에서의 한달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똑같은 돌하르방을 지나 길을 되짚어 가는 나는 한달전의 나와는 조금 다르다. 내가 제주에서 잔뜩 가져온 기념품들은 초콜릿이나 귤, 오메기떡, 장식품들이 아니라 새로 생긴 좋은 습관, 아이들과의 유대관계, 튼튼해진 다리, 완료된 독서목록 같은 것들이다.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낄 기회가 거의 없는데 이때만큼은 내가 조금 자란 것 같다. 그 느낌이 자꾸자꾸 나를 제주로 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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