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달살기, 테마 정하기

by 도리


한달살기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다양하다. 일단,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이 도심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기를 바라며 제주로 온다. 그 외에도 스쿠버 다이빙, 등산, 승마, 요가처럼 제주의 자연 속에서 하기 좋은 활동을 원하는 사람들도 온다. 책에 파묻히거나 스스로 글을 써보겠다는 마음을 먹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도저도 아니게 일상에서 멀어져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가 뜻한 바를 느긋하게 이룰만한 여유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한 달이 긴 시간 같아도 막상 한달살기를 시작해보면 하루가 갈수록 점점 빨라지는 시간의 흐름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엊그제 짐을 풀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짐을 싸야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일단 가서 뭘 할지 생각해보자는 마음을 먹고 제주에 온다면 하루하루 일정을 소화하기 바쁜 나머지 제주에 온 목적을 잊어버린 채 긴 시간을 하릴없이 보낼 수도 있다. 물론 특별한 목적 없이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달이라는 긴 시간을 뚝 떼어내고 적지않은 돈을 들여서 기왕 제주에 왔다면 왜 한달살기를 하려고 하는지, 뭘 얻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 두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나는 제주로 향하기 전 아이들과 간단한 프리젠테이션 시간을 갖는다. 이 때 하루에 공부할 양,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포함해서 대략의 하루 일과를 공유하고 아이들의 의견을 접수한다. 이 시간은 이번 한달살기의 테마를 공개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테마는 ‘매일 저녁 글쓰기’이나 ‘많이 걷기’처럼 구체적인 목적인 경우도 있고 ‘낭만과 성장의 한 달’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한 줄일 때도 있었다.

테마를 한 줄로 요약해보는 것, 특히 아이들과 공유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 테마는 한달 내내 일어나는 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중심축을 담당한다. 미리 공유되어 있는 사안이므로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우선순위에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외출 장소를 정하거나 일과의 변동이 있을 때 선택에 드는 에너지를 줄이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내가 해본 여러 테마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매일 저녁 아이들과 짧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자, 이제부터 각자 글을 써보자!’하고 무턱대고 시작한다면 어른이고 아이고 시작하는 일 자체가 고역이다. 대체 무엇을 써야할지 눈치만 보다가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갈지도 모른다.

나는 미리 글쓰기 주제를 메모해두고 그날그날 알맞은 주제를 골라서 아이들에게 제시해 주었다. ‘오늘 본 친구네 집 고양이에 대해서 묘사하기’, ‘영실코스에 오른 소감’, ‘오늘 관찰한 별자리로 이야기 짓기’ 처럼 그 날 경험한 일에 대해서 쓰도록 하는 일도 있었고 ‘엄마와 내가 닮은 점과 다른 점’, ‘내가 생각하는 대박 사장님의 비법’, ‘우리 동네에 필요한 장소’처럼 보다 일반적인 주제를 내준 적도 있었다. 아이들의 생각이 궁금할 때는 ‘엄마에게 서운했던 일’ 같은 주제를 슬쩍 끼워넣기도 하고 글쓰기가 지루해질 무렵 ‘한 문장씩 이어쓰기' 같은 게임을 해보기도 했다. 준비하느라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한달이 지나자 아이들이 첫 문장을 써내려가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질 정도로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에 보람이 있었다.

누구나 반드시 테마를 정하고 그에 따라 한달살기를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달이라는 길고도 짧은 여행을 마치고 나서 뭐 하나라도 남는 게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이라면 테마를 미리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예로 든 것 말고도 주제로 삼을만한 것은 무한히 많다. 그 중 어떤 것이라도 하나를 골라 자기 것으로 삼는다면 여행 후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토록 소박한 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