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9일-비싼 차를 뽑은 형님

by 셀린느

나의 작가 이력은 23년 쯤 된다.

2000년. 얼떨결에 광고회사에 입사한 후,

'겨울연가' 욘사마의 매력에 푹 빠져 저런 이야기 만들어보고 싶다... 생각하고.

2002년 여름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무작정 KBS 방송작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생로병사의 비밀] 창립 맴버로 시작치고는 꽤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일하다가 문득 더 이상 다큐는 할 수 없겠다 느꼈다. 객관적 진실이란 있을까? 하는 회의.

2004년에 결혼을 하고도 '파리댄서(프리랜서는 파리목숨이라고 당시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 치고는 꽤 잘나가는 작가로 일하다가,

2007년 5월 15일에 아들을 낳고 잠정적으로 일을 중단했다.


그리고.

2012년 12월 어느 날.

콘진의 대한민국 스토리공모전 4회 차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스토리 작가 길로 접어들었다.

그때, 당선된 작품이 '날개족 전사 우투리'였는데...

동양의 유일한 비극적 영웅설화, 우투리를 다양성을 상징하는 오리엔탈 영웅으로 만들었다.

나는 한국의, 아시아의 '해리포터' 실사판을 꿈꾸며 썼는데, 사람들은 내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분류했다.

그렇게 만난 당시 작품 멘토가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스튜디오 에이콘'의 김선구 대표님이다.

한국 최초 극장용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과 로보카 폴리'로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성공신화를 이루고, '태일이', 린다의 신기한 여행' 등을 만드신. 작품들 다 이런 저런 상들을 쓸어담았다.

그리고 가장 최근작품으로 '그라운드 크루 토토'.


토토.jpg 그라운드 크루 토토

우투리 멘토로 만나 로보카 폴리 스톰모션 애니메이션 작업을 함께 했다.

그 사이, 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작품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는데...

다 엎어지고...

2025년 1월 8일에 영화 '동화지만 청불입니다'로 겨우 데뷔를 했다.

대표님과는 10여 년간 느슨한 관계를 이어가며 가끔 연락해 필요한 작업을 하면서 지냈다.

두어 번은 다른 드라마 작업과 겹쳐 제안을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2022년 봄.

그라운드 크루 토토 작업 제안을 받았는데, 당시 막 시작된 드라마 작업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고사하고,

대신 천천히 해보고 싶었던 애니 기획을 역으로 제안했는데, 너무 감사하게도 선뜻 받아주셔서,

드라마 작업과 동시에 김대표님과의 본격적인 작업이 병행되었다.

그러던 중에도 난 드라마, 영화 쪽 관계자들에게 상처받았고, 내 속은 곪을대로 곪았다.

(물론 좋은 분들도 있다. 영화, 드라마 일은 사람이 나빠서 상처받기 보다는 시스템과 상황상 힘든 경우가 더 많다.)


2024년 2-5월. 극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겪고, 운동을 계기로 내 틀을 깨고 나왔다.

그리고 결심했다.

좋은 사람들과만 일하겠노라.

상황이 어쩌고, 시스템이 어쩌고 같은 변명으로 내 돈을 떼먹고 내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끝내리라.

그렇게 내가 절반의 둥지를 튼 곳이 지금의 회사, 스튜디오 에이콘이다.

이곳은 단연컨대 좋은 사람들, 보석같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곳에서 2025년 정말 힘든 줄 모르고 수많은 프로젝트를 신나게 해냈다.

그러다 재앙처럼 내게 병이 찾아온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미국 넷플릭스 프로젝트 2번째 회의를 끝내고,

난 천천히, 그리고 죄송한 마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대표님, 그리고 피디님. 저 이 프로젝트 너무 하고 싶어요.
뮤비 본 순간, 이거다! 느꼈거든요. 그런데...


작가님, 어디 가세요?


그런 거면, 좋은 거죠.


그러면요?

대표님의 눈빛이 살짝 떨렸던 것 같다. 이건 내 느낌이다.


제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건강한 루틴을 만들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선에서 일하자고.

그 끝에 대표님이 하신 말씀.


작가님. 작가님이 걱정하실까봐 하는 말이긴 한데요,,,
저희 형수님도 얼마 전에 유방암 치료를 받으셨어요.
처음엔 걱정이 컸는데...
어느 날, 형님께서 엄청 좋은 차를 뽑으신 거예요.

진짜요?


네. 그래서 어찌된 일인가 들었더니,
형수님이 암 보험을 많이 들어놓으셔서 치료 잘 받으시고도 돈이 남아서
비싼 차를 뽑으셨더라고요. 우리 형님이.


하하하하하!


나는 한참 웃었다.


작가님 걱정하실까봐 하는 말.

실제로 아주 어렵지 않은 병이다.

그리고 만약 보험까지 있으면 뜻하지 않은 좋은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담백하고 유쾌하게 대표님은 날 위로, 걱정, 배려해주셨다.

그 후, 내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많은 날, 바로 어제까지도 대표님과 스튜디오 에이콘의 따뜻한 마음씀에,

난 통곡을 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더랬다.

두구두구두구~ 개봉박두~~~!!!


대표님, 고맙습니다. 빨리 건강해질게요.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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