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살면서 충분히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일반 심리들 중 하나가 있었다.
심경의 변화가 생기면, 머리카락을 자른다.
왜?
머리카락을 자르면, 고민스러운 일이 해결되나?
어떤 인과관계가 있어서 그런거지?
많이들 그러면, 분명 이유가 있을텐데...
그래서 50년 가까이 거의 대부분 긴 머리를 유지하면서 살았다.
비교적 어울리기도 했고, 그게 관리하는 데 제일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가끔 즉흥적으로 머리 가지고 장난을 치고 싶을 때가 생긴다.
비슷한 유형의 긴머리를 너무 오래 유지하다보면, 어떻게든 변화를 주고 싶기 마련이기에.
하여,
지난 추석때, 허리 춤까지 오는 기장의 절반 정도를 탈색하여, 꽃분홍색과 보라색을 입혔었다.
남편과 아이의 반응은 똑같았다.
무슨 일 있어?
아쉽게도 그 꽃분홍색과 보라색은 금세 사라졌다.
추석 연휴 무렵엔 옅은 흔적만 남긴 채, 나와 가족 외 사람들에겐 보여주지조차 못했다.
그래서 내가 탈색 후 염색을 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문제는 탈색 머리를 관리하기가 너무 빡세다는 것.
트리트먼트를 떡칠해도 금세 빨아들였고, 허리 중간 정도까지 오는 머리를 말리는 것도 일이었다.
그래서 조만간 탈색 부위를 다 잘라버려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왼쪽 암진단을 받은 것이다.
오른손엔 드라이기를,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휘젓는 형식으로 머리를 말리는 나는,
꽤나 격렬해야 하는 왼팔 움직임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어깨 길이로 머리를 싹뚝 잘라버렸다.
내가 다니는 헤어숍은 공덕역에 있다.
아이가 초등3학년때부터 인연을 맺어 벌써 10년째 다니고 있다.
친한 친구도 두세달에 한번은 보기 힘든데...
원장님과는 꼬박 두세달에 한번씩 만난 셈이다.
그러다보니, 눈빛만 봐도 내가 뭘 원하는지 척척 알아서 해주신다.
결과도 언제나 만족스럽다.
머리카락을 절반이나 자른다는 말에 원장님이 놀라셨다.
그런 적이 별로 없었기에.
고민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문득 항암치료를 받게 되면,
어쩌면 원장님께 내 머리를 맡겨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렵게 상황을 설명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머리 해드릴게요.
그렇게 내 머리카락은 중학교 이래 처음으로 긴머리에서 벗어났다.
원장님이 숍을 나가기 전, 나를 있는 힘껏 꼭 안아주었다.
요즘 사람들이 나를 너무 꼭 안아준다.
아프니까, 좋은 일도 많다. ^^
회사에 내 상황을 알려야 해서 부랴부랴 사무실로 갔다.
다들 점심을 잔뜩 먹었다며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혹시나 해서 투썸에서 '스초생'이라는 걸 줄 서서 사갔는데...
배를 두드리는 동료들을 보니 괜히 무안했다.
어머?! 작가님이 케이크 사오셨네?
안 그래도 후식으로 케이크 먹자 얘기했었는데...
그제야 당당히 어렵게 줄서서 산 '스초생' 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플라스틱 와인잔을 숟가락처럼 이용해 케이크를 퍼담았다.
딸기가 맨 아래 박혔다. 재밌었다.
그리고 잔에 담긴 케이크 위에 초를 하나씩 박고 불을 붙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잔뜩 먹은 후.
대표님과 피디님께 진단 상황을 알렸다.
작가님.
이제부터는 작가님이 건강할 수 있는 최상의 루틴을 만드세요.
기상시간부터 오전을 무얼하면서 지내고 밥 시간을 언제로 할지,
스트레스 받지 않을 수 있는 일의 조건들을 찾으세요.
건강이 우선입니다.
네. 잘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회의가 이어졌다.
회의 후 내가 느낀 건, 좀 더 강도있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 안 받고 집중력있게 강도있는 작업을 해낼 수 있을까?
내게 던져진 숙제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습관적으로 내가 물었다.
마감은 언제까지로 할까요?
대표님이 잠시 나를 보았다.
뭐지?
뭔가 이상했다.
언제가 좋을까요?
다시 물었더니, 대표님이 씩 웃으면서 말씀했다.
이제 마감은 없습니다.
작가님이 작업한 만큼 저희에게 넘겨주세요.
그러면 감사히 잘 읽어보겠습니다.
!!!
마감이 사라지다니!
어떻게 그렇게 일을 하란 말이냐?
23년을 작가일을 하면서 단 한번도 마감을 어겨본 일이 없는 나인데...
어떻게 마감을 안 만들 수가 있지?
마감이 없이 일하는 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일단은 알겠노라며 회의실을 나왔지만.
20일이 지난 지금도 난 그 방식을 터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또, 내가 먼저 마감을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제.
내게
마감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