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첫인상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아무리 길어봤자 3초 이내일 것이다. 찰나의 시간 동안 그 사람의 가치를 가늠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겉보기만 좋아 보이면 장땡일 뿐. 물론 개인의 호불호까지 뭐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의 호불호가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약간은 철 지난 유행어지만 '빼앗긴 아싸'라는 말이 있다. 아싸가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겸손함을 표현하고자 스스로를 '아싸'라고 명명하는 것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아싸라는 것은 영어 단어 'outsider'를 줄인 것이다. 이 단어의 뜻은 '사회적 규범으로 정해진 테두리 밖에 있는 자'이다. 우리가 말하는 아싸는 무엇인가? '주류에 끼지 못하고 사회에 녹아들지 못한 낙오자'라고 할 수 있다. 'outsider'는 멸칭이 아니지만 '아싸'는 비하의 의미가 내포된 멸칭이다. 한국 사회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가 만들어낸 폐해라고 볼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싸들을 은연중에 무시한다. 단지 그들이 타인을 대하는 게 조금 서툰 것을 사회성이 없는 것이라며 낙인을 찍는다. 그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른 채 돌을 던져대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도태되었다는 표현까지 공공연하게 사용한다.
영화 '조커'를 보면 사회가 아싸를 바라보는 시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회가 바라보는 주인공 아서 플렉은 정신병을 앓고 있고 혼기가 지난 미혼 남성인데 여자 친구는커녕 독립하지 못해 어머니와 단 둘이 같이 산다. 아서는 코미디언이 되고자 노력함에도 비웃음만 듣자 결국 이성의 끈을 놓고 조커라는 악마로 각성한다.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인공이 악이라는 이유만으로 악을 정당화하는 영화라 한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해가는 과정이 아닌 결과로써의 조커만 보고 말하는 것이다.
'조커'가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사회가 아서 플렉을 무시함으로써 조커라는 악마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모의 학대, 경멸의 시선, 사회적 편견 등의 형체 없는 폭력이 그 과정이다. 이 영화는 미국 영화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이 아싸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아싸라는 단어와 개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원이 존재하는 세계인 이데아에서나 가능한 소리다. 인간의 유전자에 내재된 본능을 강제로 통제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사람이라면 경멸의 시선을 거두는 것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즈려밟는 것은 나뭇잎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