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을 정리하다가
괜히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있는 이 공간은 나와 남편이 이뤄낸 모든 것들이었다. 결혼 14년 차. 이사를 한 번 했고 처음 채웠던 살림살이들도 많이 바뀌었다. 가구도 바뀌었고 가전제품도 냉장고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것으로 교체됐다.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크고 작은 것들이 바뀐 공간은 지금 이 공간이 유일하다.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머금고 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보호 필름을 떼어냈을 때, 둘째가 바로 거실장 모서리에 머리를 박아서 세 바늘을 꿰매고 거실장은 손님방에 들어가게 된 사연. 아이들이 2층 침대를 원해서 손님방이 아이들 침대방이 되고 거실장은 결국 베란다행이 됐다는 이야기. 낮은 거실장은 걸터앉기에도 좋아서 날이 좋은 날에는 창문을 다 열어두고 거기에 앉아 아이들과 수다를 떨거나 보드게임을 했던 이야기. 지금은 캠핑용품 자리가 되어서 아쉽게 됐다는 이야기. 가성비 좋은 2층 침대를 구매한 날 서로 2층에서 자겠다고 싸우는 아이들을 말린 이야기. 2층에서 하루 자보고 무섭다며 1층으로 내려간 둘째 이야기. 지금은 결국 침대를 내려서 나란히 두고 잠들기 전 자매의 종알거리는 소리를 듣게 됐다는 이야기. 공간이 품은 모든 것들에 이야기가 담겨있다. 낮은 거실장 이동이 불러오는 이야기만으로도 이 집을, 이 공간을 더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성실했지만 알뜰하진 못했다. 그래서 이 공간을 둘러보기만 해도 콧웃음이 날 때가 있다. 아이의 친구가 놀러 왔다가 TV가 작다는 말에 남편이 바로 86인치 TV를 구매한 일. 10년 동안 고장 한번 나지 않고 아무 잘못 없던 52인치 TV는 안방에 며칠 있다가 중고로 팔려나갔다. 거실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대형 TV는 지금 봐도 웃음이 나온다. 거실 공간이 넓은 구조라 그나마 다행이다. 원래부터 TV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니었는데 덕분에 영화는 자주 보게 됐고 그만큼 볼 맛이 났다. TV는 우리 대표 허세의 증거물이 되었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등교하면 나는 집안 정리를 한다. 공간이 내 손에서 살아난다. 오늘은 안방 서랍장을 정리했다. 그동안 받았던 온갖 기념 카드와 쿠폰들이 쌓여있었다. 아이들이 만들어 온 작은 작품들도 곳곳에 숨어있다. 정리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모든 걸 끌어안고 살 수는 없듯이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떠나보내기 전에 한 번 더 만져보고 읽다 보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다 문득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떠올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그 지갑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오래된 지갑에는 떠나보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도 지갑도 낡았고, 새로운 이야기가 쌓이고 있다. 새로운 지갑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랍 안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쓰이는 마음이 많은데, 공간 자체를 바꾸는 일은 내겐 쉽지 않다. 익숙함이 발 하나를 잡았고 이야기들이 또 다른 발을 잡는다. 어리숙하다고 해도 모르겠다. 이 공간 위에 이야기를 계속 쌓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