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었다. 뮤지컬 <청 이야기>를 만드느라 서울 예술단에서 살다시피 할 때다. 어느 날 저녁,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그곳에 2008년 ‘더 뮤지컬 12월호’가 놓여 있었다. <지하철 1호선>이 종연되는 것을 특집으로, 학전이 메인 테마였다. 학전을 거쳐 간 수많은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모여 <지하철 1호선> 무대 위 세트 계단에 앉았다. 선생님은 그들 가운데 계셨고 모두가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 기사의 첫 장식이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도 저곳에서 2년을 살았는데, 나도 지하철의 모든 노래와 큐, 대사를 아직 몸으로 외우고 있는데, 내 손과 발로 저 세트를 움직이고 지탱했었는데, 나는 저 사진 속에 함께 있지 않았다. 잔치에 초대를 받았었지만, 학전으로 돌아가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공연하고 함께 웃으며 사진찍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사진 속의 사람들이 마음에 잡혔고 몹시 그리웠다. 다음 장을 넘기니 선생님의 인터뷰였다. 기자가 물었다. 수많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이 작품을 거쳐갔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마음에 남는 사람이 있냐고. 선생님께서 답하셨다. “지하철 1호선을 함께하게 되면 연습부터 공연까지 꼬박 한 살을 먹게 됩니다. 가장 젊고 아름다운 나이에 이곳에 와서 나에게 욕을 많이 먹은 사람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욕을 많이 먹은 사람들…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이곳에 와서 나에게 욕을 많이 먹은 사람들… 그래, 그 속에 내가 있었구나.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선생님께 참 많이도 욕을 먹었지… 선생님의 기억 속엔 아름다웠건 그렇지 않건 그 때의 꿈 많고, 참 많이 부족한 내가 있겠구나… 목이 아파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울었다. 한 참을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 다시 많은 그림들이 떠올랐다.
돌아보면 학전에 있을 때의 난, 연출가가 되겠다는 욕심과 야심만 가득했던 실력없고 버릇없는 대단히 개인주의적인, 대단히 이기적인 풋내기였다. 작품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장애우가 공연을 찾아왔을 때 그들을 위한답시고 작품을 변질시키려 했고, 공동체의 공동작업 속에서 내 욕심에 눈이 멀어 정작 누구도 배려하지 않았다. 연출부로서 함께하는 사람들을 살피지 못하고 내 삶의 방식만 중요하다 고집하며 새벽에 혼자 교회로 향했다. 극단을 함께 하는 모두의 하루하루, 또 한달 한달의 절실한 삶이 걸린 공연이 코앞인데 지 돈없는데도 어떻게든 결혼을 하겠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결혼을 하고도 신혼여행 바로 가지않고 공연을 올리는 것이 무슨 대단한 벼슬인 냥 스스로를 뻐겼었다. 그의 눈에 보였던 나의 이런 성향과 또 어떤 성품이 자신을 내어 놓고 전체를 아울러야 하는 연출가로서보다 다른 일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셨을 수 있고, 또 내 가정환경과 그 속에서 체화된 무엇이 그의 눈에는 연출가보다 신학자가 되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음을 난 그 때야 알았다. 그리고 학전에서의 나를 진정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생각이 뛰니 몇 가지 또 다른 기억들이 함께 밀려왔다. 결혼을 하고, 극단 식구들과 첫 집들이를 할 때, 조금 늦게 오신 선생님은 평소에 나를 대할 때와 달리 해맑게 웃으며 안아주셨다. 그러더니 딸 만큼 어린 아내에게 머리 숙여 정중히 인사하셨다. 또 우리 부모님을 만나고는 큰 절을 하시더니 무릎을 꿇은 채, “제가 아드님을 조금 괴롭히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제야 알았다. 선생님이 내게, 그때 왜 그러셨는지, 왜 야단 치셨는지, 그 뜻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 제야 알았다. 한 참을 울다가 전화기를 들어 학전에 전화했다. 내가 늘 학전에 갈 때 선생님이 계신지를 묻던 Kt에게(나와 동갑인 기획자다. 대학 때부터 학전에서 일하다가 기획실장이 되기까지 학전을 지켰다.)부탁했다. “<청 이야기> 공연에 선생님 모시고 올 수 있어?” 그랬더니 Kt가 그랬다. “안 그래도 선생님께 말씀 드렸어. 흔쾌히 가신다고 하시던데?”
청 이야기 공연이 올라가고 마지막 날, 일요일 낮 공연. 선생님께서 오시기로 하신 날이었다. 난 마음이 하도 두근거려 선생님을 어떻게 맞을지 몰랐다. 학전을 나와 처음으로 선생님을 공식적으로 만나는 자리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내가 연출한 작품을 보시는 날이다. 난 극장 문 앞에 나와 선생님을 기다렸다. 국립극장 계단 밑에 택시가 섰고, 선생님께서는 겨울에 늘 입으시는 곤색 바바리 차림으로 Kt와 함께 계단을 오르셨다. ‘어떻게 인사해야 하지…’ 극장 로비 문 앞에서 선생님을 맞았다. 난 뛰는 마음에 90도로 숙여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께선 날 보시더니 “마, 왜 정치가처럼 나와 있어?”하고 웃으셨다. 티켓을 드리고 선생님을 모셨는데, 극장에 들어가시면서 내게 딱 한마디 하셨다. “너, 노트할거다.” “네, 선생님.” 나는 보이지 않는 선생님의 뒤를 살피며 공연 내내 객석 맨 뒷 줄 데스크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공연이 끝나고 로비에서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선생님은 웃으며 내게 농을 치셨다. “그러니까 청이가 그렇게 됐다는 거지? 급하게 오느라 그냥 왔다. 애 썼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극장 로비 문까지 함께 걸으며 모시고 가는데, “나오지 마, 바쁠 텐데, 어서 들어가.”하며 손사래 치시고 로비 문을 여셨다. Kt가 뒤를 돌아보고 웃으며 내게 엄지손가락 두 개를 올렸다. 나도 웃었다. 그리고 또 울었다.
그로부터 또 시간이 한 참 지나 학전 그린이 문을 닫게 됐다. 건물주가 더 이상 학전에게 공연장 임대를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이유다. 극장을 닫는 날, 학전은 출신의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초대해 밤새 극장에서 놀았다. 나는 가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불편했다. 밤 12시 조금 넘었을 때, Kt가 전화했다. “정말안와?” “응, 안갈래” “그래도 잠깐 와서 인사만 드리는 게 좋지 않겠어?” 고민 됐지만, 뭐가 불편한지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갔다 결국. 열두시 반이 넘어서 극장에 도착하니 선배들이 많았다. 모두가 다른 시간, 이곳에서 그들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곳이다. 그들에게 이곳은 벽하나, 의자하나, 바닥하나도 마음과 손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게도 그랬다. 하지만 어느 신년 새벽, 속상해 밤새 울며 잠든 곳이 아니던가, 늘 벗어나고 싶었던 곳, 냄새도, 색깔도 모두 그대로였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약주를 많이 드셨고, 친구 한분과 객석에서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태희가 날 선생님께 이끌었다. “저 왔습니다…” 선생님은 날 보시더니 손을 잡아 앉혔다. 그러더니 옆 친구분께 이렇게 소개하셨다. “이 놈이 우리 직원이었는데, 지금 제일 잘하는 놈 중에 하나야!” 선생님은 날 향해 돌아 앉으셨다. “애가 몇 살이지?” “일곱 살입니다.” 선생님은 지갑에서 가진 현금 전부인 2만원을 꺼내 주셨다. “가서 애 용돈 줘라.” 그러시더니 “악보 받았어?” “아니요, 아직” 태희더러 손짓 하시더니 <지하철 1호선> 기념 악보를 가져오게 하셨고, 첫 장을 여시더니 이렇게 쓰셨다. ‘이종석에게, 김민기 드림’ 그 악보를 내게 주시며 “내가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 밖에 없다… 이놈아, 넌 쟁이야. 누구도 원망하지도 부러워하지도 말어. 그냥 니 일을 하는 거야. 알았지?” 부끄럽고, 죄스럽고, 행복했고, 아팠다.
작년 봄, 선생님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다시 올리셨다. 어느 주말 오후 학전 블루를 찾았다. 가기전 대학로의 옷 가게를 들려 가디건 한 장과 니트 한 장을 샀다. 그리고 문구점에 들려 노트 한권을 샀다. 노트 안에 적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직도 멀었습니다… 공연장에서 선생님을 마주쳤다. 선생님은 내 손을 힘 있게 잡았다. 객석에 앉아 깊은 숨을 쉬며, 선생님과 학전을 다시 담았다. 무언가에 대해 마음이 닫혀 있을 때는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그것은 역하고 쓰며 다가설 수 없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마음이 열리면 그것은 귀하고 달며 다가설 수밖에 없게 된다. 학전에서의 2년과 그곳을 떠난 시간동안 난 다가서야 하는 것에 대해 마음을 닫고 살았다. 선생님께선 내게 무엇에 대해 마음을 열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뜻을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