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부터 시작된 선생님의 질타와 야단은 원인도 이유도 그 때의 난 알 수 없었다. 이제야 보이는 것은, 학전에서의 2년 동안 처음 6개월을 제외하고는 내 욕망과 치기가 나를 덮쳐 몸과 마음이 달랐다는 것, 몸이 그곳에 있었음에도 마음은 그곳에 없어 교만함이 하늘로 솟았고, 미움과 원망이 나를 태웠다는 것, 그래서 극단 식구들도 함께 작업하는 배우들도 동료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그저 모두를 미워했고, 그들로부터 벗어나고만 싶었다는 것… 그 때의 내게 괴로움으로 부터 도망 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몸이 묶여 있었지만, 글 속에서는 자유로왔다. 함께하는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았고, 내 안에 갇혀 졸작들 속에서 헤맸다. 그러다 보니 <지하철> 공연 진행 중에 꼼보 할매가 노래하는 ‘산다는게 참 좋구나 아가야’ 큐를 놓쳐 배우들이 5분이나 무대에서 멈춰 서 있어야 하는 사고를 냈고(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Je형, Kk에게 미안하다.) 그 책임을 연주자 탓으로 돌리며 회피하려 했다. 또 그러다 보니 자주 다쳤다. 학전을 떠나던 날, 학림에서의 마지막 회식이 끝나고 선생님의 귀가를 위해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내게 그러셨다. “너, 신학해라.” “네?” “너 신학하라구. 너한테 잘 맞을거야.” 미웠다, 마지막까지. 선생님과의 사적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서야 선생님의 야단과 질타가 나의 무엇을 향했던 것인지 조금, 아주 조금 알 수 있었다.
몇 년이 흘렀다.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난, 인간된 도리로서의 기본적인 예의만 선생님께 지켰다. 명절 때면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채 억지로 전화를 드렸고, 스승의 날에 상투적인 감사 문자를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혹 대학로를 지나다가 옛 동료들이 궁금해서 학전 에 갈 때는 기획팀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께서 계신지 안계신지를 물었고, 계시지 않으면 찾아가 동료들을 만나곤 했다. 어쩌다 안계신줄 알고 찾아갔다가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시험 때 커닝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얼굴이 벌게진 채로 대충 인사를 얼버무리고 서둘러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나왔다. 학전에서 일할 때의 나를 아는 사람들과 술자리라도 하면 난 선생님과의 그 기억들이 떠올라 괴로웠고, 때때로 술에 취하면 분에 이기지 못해 선생님을 씹었다. “날 더러 마지막까지 신학하래!” 젊은 내게 상처는 컸고, 난 그 상처에 몇 년을 허덕이며 살았다. 반면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질투했고 부러워했다. 몇 안 되는 내 친구 중에 아주 오랜 시간 정을 나눈 무대감독하는 H라는 친구가 있다.(내 결혼식 전날도 나와 함께 둘이, 밤을 지샜다. 얘가 지금 많이 아프다. 그게 늘 마음에 짐이고 걱정이다.) 이 녀석은 나보다 어렸을 때부터 학전에서 무대감독으로 일했는데, 학전을 떠난 지금도 녀석은 때마다, 또 대학로를 지날 때 마다 서슴없이 학전을 찾았고, 선생님과 길게 대화를 나눴다. 내가 H에게 물었다. “넌 선생님이 어렵지 않니?” “왜 안어렵겠어. 하지만 참 좋은 분이시잖아.” “좋은 분인건 나도 알지. 나도 아직 존경하는걸. 하지만 너에게는 나가라고 호통 치시지 않으셨잖아…” 꿈 많던 어린 시절에 선생님께 받은 야단과 질타는 나를 오랫동안 옭아맸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