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일기 8

Scene 2 학전 외전, 김민기 ; 호시절

by Pia Jong Seok Lee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 그것도 같은 일을 하는 선배를, 선생을 존경한다는 것은 존경을 품은 후배에겐 대단한 행운이다. 나아가야 할 길과 그 길로 가는 방법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난 연출가로서의 김민기 선생님을 존경했다. 그래서 학전에 지원했고, 합격했을 땐 뛸 듯이 기뻤으며, 학전으로의 출근을 사모했다.

나보다 서너 학번 위의 선배들까지, 그중에서 특히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해 고민하며 대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대게가 선생님을 모르지 않다. 그가 의도했던 아니던 그는, 7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이었고,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인 중심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어떤 사람들에게 눈물이다. 김민기 선생님은 ‘아침이슬’의 작곡가이다. 선생님의 노래들은 어두웠던 시대를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아침 이슬과도 같은 희망과 삶의 의지를 주었다. 그 시대를 겪지 못했던 내게도 선생님의 노래들은 노래와 노랫말 그 자체로 용기를 주었다.


내가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뮤지컬 <모스키토>를 단체 관람했던 고등학교 3학년 때 부터다. 그 때의 선생님은 나에게 운동가, 민중가수라는 거창한 이미지가 없었고, 그저 내가 가야할 길의 선배인 연출가 김민기일 뿐이었다. 대학 1학년 때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봤고, 앞서 밝혔듯 대학 3학년 때는 뮤지컬 <의형제>를 봤다. 그의 작품들을 만나며 느꼈던 것은, 내가 살아가는 시대가 한명의 연출가의 눈을 통해 이렇게 잘 표현되고 소통될 수 있구나, 저런 것이 연출가의 힘이고 능력이구나 하는 것들이었다. 선생님과 인연이 없을 때부터 연출가로서의 김민기를, 나는 진심으로 존경했고, 그에 대한 소식과 작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한번은 <지하철 1호선> 연습장면을 몰래 도둑 견학한 적이 있는데, 그가 배우들을 대하는 태도와 연습하는 방식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배우들에게 특별히 많은 말을 하지 않는데도 배우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고, 그의 짧은 디렉션들은 분명한 확신과 자신감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얼마나 작품에 대해 연구하고 자신의 생각에 자신 있으면 저럴 수 있을까.’ 그의 손짓, 눈 빛, 모든 것을 마음에 새겼다.


학전에 입사하고 연출부 막내 생활을 시작한 내게 선생님은 아버지 같은 믿음을 주셨다. 그 때의 난, 뉴질랜드에서 막 돌아와 특별히 생활할 곳이 없었다. 학전에 입사하기 직전, 연극원 극단 돌곶이에서는 윤정섭 교수님이 연출하는 물체극 <물질적 남자>를 예술의 전당 자유 소극장에서 올리기 위해 준비했다. 난 조연출로 그 작품에 참여했고 연극원의 배려로 대학원(예술 전문사) 기숙사의 방을 빌려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전에 입사 하고도 기숙사 생활은 유지 됐는데 하루는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너 요즘도 학교 기숙사에 있니?” “네” “임마 졸업했으면 벗어나야지 왜 그 품에 있어, 아직도. 방 얻어. 총무한테 얘기해.” 다음날 S총무는 나를 불렀고, 방 보증금을 하라며 내게 극단 돈을 내줬다. 그렇게 해서 학교로부터 독립했고, 첫 방을 얻었다. 또 한 번은 IMF의 직격을 맞은 우리 부모님으로 인해 여러 가지 경제적 문제가 나를 덮쳐 몇 주일을 혼자 끙끙 앓고 있을 때, 선생님과 학전은 내게 아주 큰돈을 내주며 자유할 수 없었던 모든 은행 문제로부터 놓일 수 있도록 나를 살폈다. 사람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그리고 식구로 받아들인 지 이제 여섯 달도 안 되는 잘 모르는 후배에게 그렇게 선뜻 큰돈과 마음을 내어줄 수 있을까. 그 때의 나,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고, 의지할 수 없었는데 선생님은, 또 학전은 이제 갓 들어온 막내인 내게 기댈 수 있는 어깨와 마음을 내 주었다. 선생님의 마음 씀과 배려에 말로 다 담지 못하게 난 깊이 감사했다.

선생님은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원주의 토지문학관으로 내려가셨다. 젊은 내 눈에는 이미 많은 것을 이루셨는데도 선생님은 늘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동서양의 고전을 열독하며 애 쓰셨다. 선생님에게는 열정이 보였고,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작품들이 동시대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그 삶 가운데 예술가로서, 또 동시대인으로서 날이 서 있었다. 학전 4층에는 선생님의 작업실이 있었다. 그 방에는 무수히 많은 책들과 자료들이 가득했다. 선생님은 일산 집보다는 원주와 4층 작업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늘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고, 차분히 호흡 했으며 매사에 신중했다. 선생님은 사람 사귐에 있어서도 차별이 없었다. 상대가 어리든, 가난하든, 권력이 있든, 그렇지 않든 그저 생명을 가진 귀한 사람으로 대했다.


한번은 제주도에 <지하철 1호선>의 공연을 위해 내려갔다. 셋업을 하다가 식사를 하기 위해 선생님을 모시고 길 건너 식당을 가는데,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이었다. 차들이 지나가다 우리가 건너니 멈춰 섰다. 선생님은 길을 건너며 우리 옆에 선 자동차들을 향해 일일이 손을 들고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한번은 남이섬으로 학전 공연팀과 연습팀이 함께 MT를 갔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옷을 입은 채로 강물에 뱅글 돌아 뛰어 드셨다. 깜짝 놀라 선생님에게 가려 했더니 S총무형은 내 손을 잡고, “그냥 둬, 옛날에 완도에서 김 양식 하셔서 수영 잘하셔” 하는 게 아닌가. 선생님은 곧 물 위로 나오셔서 의자에 앉은 채로 담배를 물고는 “시원하다” 하시며 껄껄 웃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대단히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대할 때나 작업을 대할 때, 그는 예의와 대단한 고집이 있었다.


<지하철 1호선> 무대감독을 할 때 소품 가방의 귀퉁이가 떨어져서 급한 대로 청 테이프를 붙여 가방을 수리해서 무대에 내 보낸 적이 있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난 선생님 방으로 호출됐다. “야 이놈아, 어따 대고 청 테이프를 관객들에게 보여! 너만 볼거하고 손님에게 보일 거하고 구분을 못해!” 편리함과 고단함의 선택에 있어 그는 고단하지만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면 고단함을 택하라고 내게 가르쳤다. 또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지하철 1호선> 2막에는 정신지체 장애아이가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장면이 있다. 어느 날 휠체어를 타고 우리 공연을 관람하러 오신 분들 중에 2막에 등장하는 병과 비슷한 병을 앓고 계신 분들이 오셨다. 난 마음이 탔다. 그 장면이 저 분들에게 상처가 되면 어떡하지,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모습의 사람을 보고 웃으면 저들의 마음이 어떨까… 난 걱정됐고, 고민하다가 공연 중에 급하게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오늘 관객 중에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계세요. 2막의 장애아 장면을 어떻게 할까요, 빼면 안 될까요…” “종석아, 그 장면은 그들을 조롱하기 위하거나 그들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전하려고 만든 장면이 아니야. 그 장면에서 장애아는 영웅이야. 그들은 선녀를 구하려고 ‘불이야’라고 외치잖니. 핵심은 거기 있어. 그대로 해.” 내 어린 마음에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난 그의 지시를 따랐고, 공연은 내 염려와는 달리 아무런 문제없이, 아무런 조롱과 웃음, 상처 없이 여느 날과 같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 걱정속의 그들도 얼굴이 밝았다.


그를 가까이 모시고 지켜보며 난 그의 모든 것을 배우고 싶었다. 뮤지컬 연출가로서의 음악적 소양, 시대와 소통하기 위해 늘 최신 뉴스와 이슈를 민감하게 탐구했던 모습, 동서양 고전 연구를 통한 인문학적 소양, 사람에 대한 편견 없는 예의, 겸손함, 자신의 작업과 작품에 대한 확신과 통찰. 난 그의 모든 것을 배우려했고, 또 배우고 싶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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