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즈음은 2005년 상반기 <지하철 1호선>팀의 연습 중이었다. N형이 조연출이었고, 나는 조연출보 겸 무대감독이었다. 우리 공연의 오픈은 1월 15일이었는데, 난 그 한 주 전인 1월 8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사실 그때의 나는, 돈이 없었다. 집안의 아무 도움 없이 결혼을 준비해야 했는데, 수중에 돈은 없었다. 유복하게 잘 자란 아내에게는 미안했지만 무료 결혼식을 물색했다. 그러다 도움 받은 것이 1월의 첫 주말, 8일 토요일에 첫 순서로 결혼식을 올리면 식대 외에는 모든 부대비용을 받지 않겠다는 결혼 컨설턴트의 제안 때문에 그 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모든 것이 두려웠다. 혼수, 예물은 고사하고 결혼식 당일 식대마저도 온전히 해결될 수 있을까 두려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마음을 졸였다.
결혼식 당일, Ch와(아까 앞에서 설명했던 우리집 10분거리 산다던 뭐시기 그 배우) Je(고등학교 2년 후배. 여배우. 오랜시간 많은 생각을 나눈,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후배다.)의 축가에 맞춰 신랑 입장을 하는 순간에도, Ka의(배우, 지하철 1호선을 함께 작업함. 동생 Kw도 배우, 동생은 이때로부터 한참 후에 <쓰릴미>를 함께 작업했다.) 축가에 맞춰 아름답고 아주 젊었던 신부가 입장할 때에도, 그리고 결혼식 내내에도 혹여 예식을 마치고 새로운 부모님들 앞에서 시댁이 돈 없어 망신당하지 않을까 떨었다. 신랑, 신부 퇴장이란 구령에 맞춰 웨딩마치를 시작했고, 전통예술원 후배 B가(가야금 병창, 명창 안숙선 선생님의 제자, 대학시절 <영원한 사랑 춘향이>를 함께 작업했던 국악인) <가시버시>를 불렀다. 노래는 흥겨웠고, 길 옆 모두가 일어나 젊고 어린 우리에게 축하를 보냈지만, 내 눈은, 그 길 끝에서 날 기다리던, 축의금을 받아준 연출과 후배 Lj(연출과 후배이고, 후에 학전 연출부의 동료가 되었다.) 형에게 고정 되어 있었다. 형에게 다가섰을 때 물었다. “어떻게 됐어?” “됐어!” 난, 그제야 웃었다.
그 다음 월요일부터 다시 연습에 복귀해서 공연을 준비했고 1월 15일, 2005년 상반기 팀의 공연이 시작됐다. 당연히 신혼여행은 가지 못했고, 공연이 오른 이틀 후인 1월 17일 N형이 새벽에 우리부부를 공항에 데려다 주어 북경으로, 정말 더럽게 추울 때, 남의 집 겨울 여행에 낀 것 같은 패키지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결혼식을 마치고, 공연이 오르고, 여행을 다녀와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잘 다녀왔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임마, 결혼식 날짜를 왜 그렇게 잡아, 공연이 코앞인데 꼭 그날 결혼을 해야 했어?”라고 야단 치셨다. 상처였다. 뜨겁고 큰 무언가가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죄송합니다. 그날이 좋았어요…” 입에서 작게, 기계적으로 대답이 새어 나왔다.
‘젠장, 그래 떠난다. 이런 욕먹고 이런 대접 받을 바엔 떠난다.’ 힘들었다. 분노가 가득했고, 화는 눈을 가렸다. 내가 누구인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도 분간이 안됐고, 과연 내가 연출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자신감도 자존심도,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잠든 아내를 보며 ‘이 사람에게 당당한 남편이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요동쳤고, 내가 무시 받으면 내 가족이 무시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득했던 분노는 미움을 낳았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썼으나 내 마음인데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사표를 준비했다. 유령처럼 몇 개월을 학전에 등퇴장 하다가 6월에 연출부 맏형에게 사표를 냈다.(그때는 이미 K형이 영화를 촬영하느라 학전을 떠났다. 대신 그 자리를 학전의 오랜 증인이자 존경하는 배우, L형이 이끌었다.) 다음날 S총무가 나를 불렀다. “들었어, 네 얘기. 조금만 더 참아봐. 선생님께선 아직 모르셔. 니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넌 연출 지망이니까 더 배우고 찾아야지.” 화가 깊은 나는 형에게 독을 뿜었다. “형, 난 연출부인데, 내가 연출 지망이면 형은 총무 지망이예요?” 악에 받쳐 있었기에 나를 붙드는 그의 호의도 곱게 들리지 않았다.
다음 날이었다. 토요일 오후였다. S총무 형이 기쁜 얼굴로 극장에 출근하는 나에게 달려왔다. “종석아, 워크숍 시작해. 선생님께서 니가 하고 싶은 작품으로 골라보라 시더라. 정말 잘됐지! 작품 고르는 대로 어서 준비하고 시작하자.” 형의 손을 통해 내 사표는 돌아왔다. 기뻤다. 그런데 기쁨이 다 차오르기도 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작품을 하라니까, 그렇게 원했던 연출을 하라니까 알게 됐다. 하고 싶은 작품이 없다는 것을. 연출하고 싶다고 발악하고 눈과 마음에 독 품고 사람들을 쏴 댔지만, 막상 작품을 하라니까, 할 수 있는 때가 오니까, 내가 할 작품이 없었다.
난 연출가로서, 또 예술가로서 아무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작품을 통해 세상에 말하고 싶은 것도, 작품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말하고 싶은 것도 하나 없었다. 그저 나로서, 연출을 할 수 있는 나를 증하고 싶어서 그 난리를 피고 다녔다. 선생님께 완벽하게 졌다. 더 이상 학전에 머무를 수 없었다. 다시 사표를 썼다. 이번에는 S 총무형도, 연출부 맏형인 L형도, 선생님도 나를 보내주셨다. 나 떠난다고 송별회를 하는데, 아주 비싼 횟집에서 모든 학전 식구가 모였다.(학전 다니면서 그렇게 좋은 횟집에 간적이 없었다.) 선생님은 떠나는 내게 좋은 음식과 좋은 술을 내게 먹였다. 그리고 학림으로 자리를 옮겨 학전 다니면서 처음으로 양주도 내게 먹였다. 그렇게 귀한 음식과 술을 밤 가득 담고, 2005년 9월, 지방 공연동안 두 번 늘어난 왼쪽 발목 인대에 깁스를 한 채 난 극단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