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일기 6

이상의 충돌

by Pia Jong Seok Lee

<지하철 1호선> 무대감독을 거쳐 <우리는 친구다>라는 아동극의 무대감독을 맡았고, 그 후 다시 <지하철>의 무대감독을 맡으며 여러 무대를 경험했다. 돌아보면 그 시간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무대감독으로서 매일 반복되는 무대진행의 지겨움이 아니었다. 난 연출부로서 작품에 관한 아무런 예술적 역할을 못하는 것이 힘겨웠다. 후배 배우들은 작품과 인물에 대해 김민기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나는 그 가까이에서 벙어리처럼 듣기만 할 뿐, 어떤 견해를 내놓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놓을 수 있었는데 내 맡은 역할이 그러하기에 내가 스스로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내 마음을 곪게 했다. 그게 힘들었다. 6개월이 넘고 1년이 지나도 내 역할에는 변함이 없었다. 기약도 없었다. 그러한 내 마음과 기운이 밖으로 표출되었는지 연출부 형들과의 관계도 불편해졌고, 극단의 다른 식구들과도 계속해서 충돌하기만 했다. 작품을 하면서 여러 배우들을 만나고 여러 후배들도 만나야 했다. 부끄러웠다. 내 스스로가 그렇게 바보 같을 수가 없었고, 중심을 잃어버렸으며 기약 없는 기다림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마음을 다해야 하는데, 다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눈과 입에서 독이 나왔다. 다른 파트에서 연출부와 관련되지 않은 일을 내게 부탁 또는 요구했을 때 나는 극단 막내임에도 응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기획파트에서 지난 공연들 포스터를 정리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건 기획파트 일이잖아,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라고 답했고, 버티다 짬밥에 밀려 할 수 없이 포스터를 정리할 때도 눈에서 독을 뿜으며 그저 빨리 일을 끝내려고만 했다. 난 입사할 때 선생님께서 약속하셨던 무대감독 6개월, 조연출 6개월, 워크숍의 순서를 손을 꼽아가며 기다렸지만, 6개월이 지나도 난 여전히 무대감독을 해야 했고, 또 6개월이 지나도 조연출이 아닌 조연출 보를 해야 했고, 또 6개월이 지나도 난 여전히 그 자리에서 맴돌며 공연 전 배우들 음료수를 준비하고, 스타킹과 화장품을 사 나르고, 연습용 음향을 플레이만 하고 있었다. 내 안의 갈등이 넘쳐났다. 난 연출하려고, 연출하고 싶어서 이곳에 들어왔는데, 왜 나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으실까.


독은 나로부터 뿜어져 나와 극단 식구들을 중독 시켰다. 화살은 이미 쏘아졌고, 그 촉은 모두를 찔러 다시 내게 돌아왔다. 상처는 나와 서로에게 깊어졌고, 그러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선생님 또한 불편하고 어려워졌다. 선생님은 거의 매일 맥주를 ‘도시락’이라는 이름으로 들고 다니시며 드셨는데, 술자리를 가질 때면 선생님은 내게 “가! 임마, 너 필요 없어, 어디서 대접받을라고. 니가 예고 나오고 예종 나왔어? 나도 임마 경기고에 서울대야!”라고 소리치셨다. 나는 그의 그런 일갈이 나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라고 믿으려 노력했다. 아니 믿으려 애썼다. 그는 술자리마다 늘 비슷한 어조로 나에게 야단치셨다. “니가 무슨 장관이야? 왜 대접 받으려고 그래, 나가 임마, 그럴 거면. 중이 절이 싫으면 절을 떠나야지, 왜 절을 뽀개려고 그래!” 그런 야단침의 횟수는 잦아졌고, 또 어떤 때는 배우들 앞에서도 가리지 않으셨다. 상처였다. 잘하고 싶은데, 좋은 연출가가 되고 싶은데 자꾸 야단만 치시니까 숨쉬기도 어려웠다. ‘내게 약을 주시느라 그러실거야.’ 스스로 위로하고 달리 생각도 해 봤지만, 27살 꿈 많은 그때의 선생님의 일갈과 야단침은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의 아픔이었고, 믿음에 대한 배신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어느 날 세밑에, 폭발했다. 지금까지는 선생님께서 내게 뭐라 그러셔도 난 꿋꿋이 참고 대꾸하지 않았다. 나가라고 하셔도, 필요 없다고 하셔도 난 견뎠고 잘 참아냈다. 그런데 그날은, 그렇지 못했다. 2004년에서 2005년으로 해가 바뀌는 그날 새벽, 우린 늘 그랬듯이 한 해의 마지막 날, 학전에서 공연하고 있는 전체 배우들과 함께 공연 후 회식을 했다. 그 전해에도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을 보냈기에 난 사실, 조금 불만이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데, 송구영신 예배도 드리고, 가족과 함께 세밑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더구나 그때의 나는 결혼을 약 이십여 일 앞두고 있었기에 그러한 욕망은 더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회식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이미 집이나 가족에게 돌아가기에는 글러버린 시간이 되었다. 열두시가 조금 넘어 난 회식장소 근처에 있는 연우 소극장 1층의 교회로 빠져나갔다. 필리핀 이주민들이 많이 오는 작은 교회인데, 난 그곳에서 그들과 송구영신 예배를 혼자 드렸다. 마음이 그렇게 편했다. 필리핀 이주민들의 환대 속에서 새해 인사를 나누고 다시 회식 자리로 돌아왔다. 회식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자리는 끝을 향했다. 자리가 정리되고 선생님께서 집으로 가신다 해서 연출부와 극장 식구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나갔다. 그런데 선생님은 갑자기 학전 그린 소극장으로 가시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황소고집 당할 수 없어 우린 맥주를 사들고 극장에서 2차의 자리를 벌렸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선생님은 갑자기 나를 힐난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모두가 함께해야 하는데,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고. 왜 너만 생각하냐고. 다른 사람은 너처럼 가족도 교회도 가고 싶지 않냐고. 그럴 거면 나가라고, 빨리 나가라고. 너 까짓것 필요 없다고!!! 참아왔던 설움이 터졌다.

“선생님은 왜 맨 날 저보고 나가라고만 하세요! 저는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저를 안 받아 주시잖아요! 저 안 나갈 거예요, 저 안 나간다구요! 그러니까 저보고 맨 날 나가라고 소리치지 마세요!!”


엉엉 울었다. 정말 펑펑 울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울다가 <지하철 1호선> 대도구 의자에 기억도 없이 잠이 들어버렸다. 그렇게 2005년의 새해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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