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스가 떠나자 나는 본격적인 연출부 막내 생활이 시작됐다. 처음 맡은 작품은 학전 그린 소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던 <지하철 1호선>의 무대감독이었다. 김민기 선생님은 입사 면접 당시 처음 6개월은 무대감독, 나중 6개월은 조연출의 시간을 갖게 될 거라 하셨고, 이후 워크숍을 통해 연출의 기회를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 이제부터였다. 소림사에 무술을 배우러 들어가도 물 긷기 3년, 불 때기 3년, 밥 짓기 3년 후에야 품세라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난 그 첫 관문인 만큼 <지하철 1호선>의 무대감독을 잘 해내고 싶었다.
무대감독을 인수인계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연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그래서 처음 1주일은 공연장에서 매일 공연을 관람하며 동선과 장면의 큐(cue)들을 견습으로 익혔다. 내 선임 무대감독은 나와 이름이 한 글자 차이인 ‘이종서’였다. 청주대 연극 영화과를 다니다 군대 가기 전의 시간을 학전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의 입대가 가깝기 때문에 나는 두 주일 동안 <지하철 1호선>의 모든 것을 인수인계 받아야 했다.(종서는 지금 상해에 있다. 이제는 나와 친형제 같은 사이가 되어 마음과 삶의 끈을 서로 이어가고 있다. 그는 지금 사업가로 변신 중이다. 돈 많이 벌어 날 위해 꼭 극장을 지어준다고 약속한 내겐 더없이 소중한 동생이다.) 공연 견습이 끝나고 백 스테이지(back stage)로 들어갔는데, 아이고… 세상에 이럴 수는 없었다. 내가 공연을 관람할 때 봤던 드라이아이스, 포그, 지하철 문의 열리고 닫힘, 전동 계단의 나오고 들어감, 샤막의 오르고 내림, 때때로 또는 동시에 진행되는 모든 효과와 수많은 큐들을! 세상에 모두 무대감독 혼자 진행하는 것이 아닌가!!
25살에 이미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김석만 선생님의 연출로 함께 참여했던 <영원한 사랑 춘향이>로 난 무대감독의 모든 시스템과 진행을 경험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곳, 대학로의 현실은, 대학 때 배우고 경험했던 무대감독의 역할과 기능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하철 1호선>의 무대감독은 다른 스태프들에게 큐를 주는 콜러가 아닌 다람쥐처럼 재빨라야 하고, 곰처럼 우직해야 하며, 대단히 민첩하게 판단하여 늘 문제가 있는 소극장의 공연을 아무 사고 없도록 오직 몸 하나로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세트의 문을 열고 돌아서서 1초 기다리면 무대감독의 등 뒤로 배우가 지나가고 다시 문을 닫고 벽에 붙으면 배우가 무대감독의 앞을 지나가는 동선까지 계산되어 있었다.
첫 하루, 종서는 나를 걸그적 거리게 생각하지 않고 이쪽 저쪽으로 나를 옮겨 세우며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일들을 완벽히 수행했다. 2시간 20분의 공연이 끝나고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손이 떨렸다. 두려웠다. ‘내가 이걸 해야 하는 건가… 할 수 있을까… 도망칠까… 현장이 이런 거였어? 난 연극원 나왔는데, 이미 국립극장에서 140명을 운영하며 무대감독을 해 봤는데, 젊은 연극제에서 연출로 히트도 쳐봤는데, 이건 뭐야… 아니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동시에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지…’ 꼬박 두 주일 동안 종서와 나는 거의 모든 생활을 함께했다. 극장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배우들이 화이트보드에 전날 적어놓은 갖가지 필요물품을 구입하러 화장품 가게며, 슈퍼마켓이며 돌아다녔다. 극장으로 돌아와서는 각 배우들의 분장대에 그 물건들을 분배했고, 큰 휴지통을 비웠으며 드라이아이스 한 박스를 주차장에서 극장으로 가지고 내려와 망치로 쪼개 아이스박스에 채워 넣었다. 공연 중 땀을 흘리는 배우들을 위해서 냉장고에는 1.5L 음료 세병을 종류별로 준비해두고 무대 바닥을 걸레질했다. 그것이 끝나면 무대 장치가 혹시 고장 나거나 문제가 있지 않은지 점검을 했고, 그리고 나면 시간대별 배우들의 마이크 테스트, 몇몇 장면의 연습, 객석 정리 및 공연 준비, 하우스 오픈(객석에 관객들이 들어오는 것을 의미), 프로그램 판매, 공연 시작이었다. 대학 1년 때 아니, 예고 1학년 때의 생활로 돌아간 듯했다.
두 주일간의 인수인계 기간 동안 종서는 정말 대단히 어른스럽고 침착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나를 이끌었다. 종서는 그 기간 동안 나에 대한 교육과 공연의 진행 모두를 훌륭히 소화해 냈다. 몇몇 장면에서는 내가 무대 진행을 해보도록 이끌었고, 혹여 내가 실수하면 아주아주 재빠르게 그 실수를 메꿨다. 하지만 나는, 매일매일이 그렇게 몸과 마음이 어려웠다. 어떤 예술적 활동이나 고민도 내겐 필요치 않았고, 아니 사치였고, 오직 공연을 사고 없이 잘 진행할 수 있도록 머리가 아닌 몸으로 외워야 했다. 그때 함께 공연했던 배우들 중에는 학교 후배인 Ch(고등학교와 대학의 2년 후배이다.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로 우리 집에서 약 10분 거리에 살고 있다. 언제나처럼, 난 그 아이가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난다.)와 Kj(대학 후배, 그 아이를 알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농담이 아닌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늘 우리 대화는, 그것이 설령 진지한 얘기일지라도 농담에 녹여 대화했다.)가 있었는데, 그들은 예술가로서, 나는 그저 기능적 스태프로 만나야만 했고, 나는 그들의 편의를 최대한 돌봐주어야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젠장!!! (그래도 두 사람에게 고마웠다. 녀석들은 형이 바닥 걸레질하지 못하도록 틈틈이 무대 청소를 해 주었고, 드라이아이스도 몰래몰래 준비해 주었다. 녀석들과의 정이 두텁다.)
두 주일간의 인수인계가 끝났고, 종서의 입대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날, 나는 외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7시 30분, 공연 시작, 난 드라이아이스를 피우고, 계단을 빼내며 동시에 2층 샤막을 올렸다. 이제 누구도 내 뒤에 없다. 사고가 나면 공연은 끝이다. 멈춤이 없어야 했다. 객석에서는 종서와 K형, N형이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전에서 내게 준 첫 물동이, 첫 번째 관문이 이제 시작되는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우당탕 소리를 내며 1막이 끝났고,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2막도 끝이 났다. 첫 데뷔를 하는 나를 위해 배우들도 나의 실수를 그들의 몸과 마음으로 견디며 막아 주었고, 모두의 도움과 노력으로 공연은, 보이는 사고 없이 끝났다. 휴게실에 있는데 연출부 두 형들이 내려왔다. 날 데리고 나가더니 근처 횟집에 가서 나를 앉혔다. 아직도 얼떨떨하며 정신이 없는 내게 K형은 소주를 따러주며 “마셔, 술 마시고 마음을 내려야 해.” 내가 술을 받고 한잔 마시자 형은 버럭 큰 소리로 말했다. “눈 똑바로 떠, 네 눈이 흔들리고 있어. 별거 아니야. 너 오늘 해냈잖아.” 하지만 내 눈은 똑바로 멈춰 설 수 없었고, 뭘 했는지도 모르게 지나간 시간들, 그리고 다시 내일 저녁이면 몸으로 만나야 할 그 시간들이 두렵기만 했다. K형은 “너, 다시는 그렇게 눈 뜨지 마.”라고 야단쳤다. 종서는 나를 칭찬하고 위로하며 군대로 떠났다.
<지하철 1호선>의 무대감독은 모든 큐를 머리와 입으로 진행할 수 없었다. 몸이었다. 몸이 외우고, 몸이 움직이고,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생각보다 몸이 먼저 달려갈 수 있어야 했다. 심지어 앞에서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데 지하철을 표현하는 무대장치 문이 떨어지고, 바로 코앞에 있는 관객들이 그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장면이 진행되는 동안 몸으로 버티고 있다가 노래가 시작되면 드럼 박자에 맞추어 드릴을 돌리며 문을 고치는 일도 다반사였다. 쉼 없이 매일 돌아가는 공연에서 대대적인 무대 보수는 어려웠고, 벌써 몇 년을 지탱해 온 무대는 보이지 않게 깨지고 상해 매일매일 페인트와 조임, 고침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매일 밤이 지났다. 긴장과 적응은 3개월이 지나자 일상으로 변했다. 그러다 보니 공연 중에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담배도 피우고, 운동도 하고 별짓을 다 할 수 있었다. 또 어떤 상황이 와도 전혀 겁나지 않았고, 공연을 멈추게 하지도 않으며 겁 없이 익숙하게 내 몸이, 공연에 필요한 모든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망치질, 페인트칠 등 무대 작업에 참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고, 선배들도 그런 부분을 내게 야단쳤는데, 이제는 무대 위의 모든 작업과 진행이 쉬웠다. 그 6개월간 소극장 공연의 모든 일상과 무대 메커니즘, 또 몇 번의 지방공연을 통한 이동과 설치, 스트라이크(strike, 무대 철수를 뜻하는 용어)를 통해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 있었다. 이제 비로소 온전히 무대를 아는, 또 무대를 사용할 줄 아는 연극 작업자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