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일기 4

학전과 그립스, 대학로 생활의 시작

by Pia Jong Seok Lee

만만치 않았다. 내가 대학로에 들어왔다라는 것을 실감한 것은 출근 첫날이었다. 연출부 형님들은 날 반기며 점심 식사를 하자셨고, 나도 좋다고 따라갔는데, 아 글쎄 대 낮에 식사를 하면서 소주를 주문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이야 삶이 깊어 반주가 익숙하지만, 그때의 나는 점심 식사의 반주가 낯설었다. 함께 식사를 하며 느꼈다, 제대로. 아… 여기가 대학로구나. 이제 정말 극단 생활이 시작되는구나… 형들과 나, 우리 셋은 자연히 출근부터 퇴근까지 거의 모든 삶의 행적이 같았다. 매끼 식사와 연습, 흡연 등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나눴다. 형들로부터 소주를 배웠다. 대학로 인근의 곳곳, 골목 구석진 곳들까지 형들 따라 음식도 소주도, 참 많이도 먹었다.


학전은 늘 모두가 바빴다. 모두가 일인 몇 역씩을 해야 극단이 운영되었고, 공연이 돌아갈 수 있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입사한 2003년 9월은 지하철 1호선의 2000회 직전으로 우리 학전과 독일의 형제 극단인 그립스(Grips Theater,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원작인 <Line 1>가 그곳 작품이다. 그곳에는 독일의 김민기인 폴커 루드비히가 대표다. 폴커는 학전의 <지하철 1호선> 1000회 공연부터 저작료를 받지 않았고, 이 작품을 학전의 것으로 인정했다.)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에서 몇 가지 공연과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문예회관 대극장(지금의 아르코 예술극장)에서는 독일팀의 오리지널 <지하철 1호선>인 <Line 1> 공연이 오를 예정이었고, 그 무대 위의 모든 사전 준비와 현장 진행을 우리 연출부가 맡았다. 내 임무는 테크 라이더(Technical Rider/공연 프로덕션이 해외 또는 지방 공연을 갈 때 상대 극장 및 스태프들과 기술적인 의견, 정보를 교류하기 위해 모든 것을 기록한 지침서)를 번역하고, 주요 스태프들의 통역을 하며 대학로 문예회관 공연 시 K, N 형들과 독일의 예술 감독인 패테 사이에서 모든 큐를 영어와 한국어로 전하는 콜러(caller)의 역할이었다. 대학 때부터 학교 정기공연과 전통 예술원의 가무극 공연에서 김석만 선생님(연출가, 내 대학시절 3학년부터 졸업까지의 연출 지도교수, 그분께 배운 것이 연출가로서의 3차 토대가 됐다.)으로부터 무대감독을 훈련 받았기 때문에 일은 고돼도 두렵지 않았다. 그립스의 공연은 잘 준비됐고, 세트, 조명, 음향 모든 부분에서 우리와 그립스는 서로의 생각을 잘 조율했다. 독일 예술 감독 페테의 변덕이 불편함을 만들기는 했지만, 연출부 형들의 다양한 경험과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는 태도는 그의 변덕을 재웠다. 그렇게 공연이 잘 시작됐고, 그립스와 학전, 우리 모두는 새로운 경험의 나눔과 관객 반응에 기뻤다.


그런데 실수가 있었다. 어느 날 1막 공연 후, 인터미션을 갖고 2막을 시작하기 전 매뉴얼에 따라 모든 연주자와 스태프, 그리고 배우들이 제 자리에 있는 것을 인터컴을 통해 확인했다. 2막 시작을 위해 페테, 그리고 K형과 10초 카운트 후 2막을 시작하는데, 카운트 후 ‘음악 고(Music Go)’를 해도 연주가 시작되지 않았다. 연주자들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몇 번을 ‘고’를 불러도 연주는 시작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다시 연주자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부르며 허둥대는데, 내 콜도 없이 갑자기 음악이 연주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울화가 치민 나는 인터컴을 켜 놓은 것도 잊은 채 ‘이런 씨발!’을 외쳤다. K형이 ‘뭐야!’ 하면서 나를 쳐다봤다. 형의 매서운 눈빛을 못 본 사람은 그 눈빛이 얼마나 사람을 긴장시키는지 모른다. 2막은 그렇게 느닷없이 시작됐고, 무탈히 잘 마쳤다. 공연 후 형이 날 불렀다. “임마, 여기서 넌 개인이 아니야. 네가 무얼 하든 어떤 상황이든 네 감정이 드러나면 안 돼. 알아들어!”

“네…형.”


그립스 극단의 작업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들은 자유로웠다. 연출가인 폴커와 배우들이 서로 격없이 지냈고, 작업에 대한 양과 시간의 흐름에 대해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면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많은 수다들을 떨었다. 늘 웃었고, 배우와 스탭들이 나이가 많건 적건 서로의 어깨를 툭툭치며 대화했다. 해석과 표현에 있어서도 어떤 예술적 의지의 표현하려는 강렬한 욕구보다는 온몸으로 무대 위에서의 섰고, 스스로의 작업을 즐기는 듯 보였다. 어쩌면 우리와는 다른 사회적 구조가, 시스템이 그들의 삶이 우리보다 조금은 윤택하기에, 내가 아직 초보 예술가였기에 느꼈던 외경심 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들이 작업에 임하는 태도는 우리와 달랐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풀거야?’의 논리로 시작하지만, 스태프 회의 때마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No Problem'이라고 먼저 말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문제점들은 아무것도 아닌 듯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나는 언제나 긴장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평온했다. 공연과 행사가 모두 끝나고 그들이 돌아갈 때에, 공항에서 이별하면서 젊은 배우는 젊은 배우들대로, 나이가 있는 배우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우리와 이별 인사를 나눴다. 더러는 울고 더러는 웃으며 떠났다. 그런데 난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그저 부러웠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이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평생을 한 극단에서 폴커 루드비히라는 연출가와 함께 일하고, 여행을 다니고,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루하루의 무대 위에서의 삶에 만족하며 서로의 오늘과 내일을 변함없이 공유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이 폴커에게 지하철 1호선에 대한 자신의 저작권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김민기 선생님에게 조건 없이 내어주며 그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동시대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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