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학전이라는 극단에서 2년간 연출부로 작업했다. 그때는 나름 뉴질랜드에서 갓 돌아왔기에 영어에도 자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1년 동안 전공과 무관히 그곳에서 영어학원 매니저로 일했다. 환경과 삶의 방식은 나와 맞았으나, 마음의 돌덩이처럼 누르던 향수, 고향이 아닌 무대에 대한 그리움이 병처럼 깊었다. 학전에서 연출부 채용 공고가 난 것을 보자마자 환경이고 삶의 질이고 다 던져 버리고, 뉴질랜드 생활을 접었다. 집도 절도 없었지만 서울로 돌아갔고, 포트폴리오와 자기소개서를 만들어 접수했다. 면접시험을 보러 가니 학전 2층 사무실 옆 휴게실에 4명의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학전 대표 김민기 선생님, 연출부 짱 K 조연출, 연출부 둘째 짱 N 조연출, 총무팀장 S. 그들 앞에는 학교 작품 사진들로 간신히 꾸민 내 포트폴리오가 놓여 있었다. 의욕과 절실함이 강했기에 공간도 사람들의 기운에도 눌리지 않았다. 연출가와 배우와의 관계를 영어로 말해보라는 뜬금없는 면접을 씩씩하게 치러 냈다.
학전에 대한 내 인상은 군 시절부터 시작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뮤지컬 ‘지하철 1호선’과 ‘모스키토’ 등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내가 학전이라는 극단을 진정 알게 된 계기는 뮤지컬 ‘의형제’ 때문이다. 대학 2년 선배 M(학교 때 거의 모든 작품의 주역을 했던 누나다. 난 누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대학생활을 통해 경험한 누나는 예술가가 가져야 하는 그릇들을 가지고 있었고, 무섭게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누나가 졸업과 동시에 학전의 ‘의형제’ 오디션에 간난이라는 배역으로 합격한 것이다.
98년 9월, 누나의 공연이 올랐다. 난 9월 5일 토요일 저녁 공연을 보았고, 누나와는 다음 날인 6일 혜화역 바로 옆에 있는 ‘피자 앤 파스타’에서 점심을 나눴다. 누나가 샀다. 내가 이 날짜들과 요일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다음 날인 9월 7일 월요일에 논산으로 입대했기 때문이다. 군대 가기 전 마지막으로 본 작품이 누나가 출연했던 <의형제>였다. 누나가 연기한 간난이는 공연 내내 몸을 덥혔고, 다른 나라의 작품을 번안, 연출한다는 것이 어떠해야 함인지 그 기준을 <의형제>를 통해 배웠다. <의형제>는 영국의 극작가이자 작곡가인 윌리 러셀(Willy Russell)의 <Blood Brothers>를 원작으로 두고 있고, 연출가 김민기 선생님이 해방 이후부터 7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상황을 작품으로 치환, 번안한 역작이다. 사실 원작보다 극적 구성이나 인물 간의 갈등, 목표, 밀도들이 훨씬 뛰어나다고 난 생각한다. 입대하기 이틀 전, <의형제>를 통해 난 한국 뮤지컬과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보았고, M 누나와의 마지막 식사를 통해 누나의 모습과 작품의 모습, 그리고 이 작품을 만들어낸 극단 학전의 모습을 아주 깊이 마음에 두고 군대로 떠날 수 있었다.
상병, 병장 휴가 때는 단국대를 다니던 J가(고등학교 2년 후배인 아주 뛰어난 배우.) <의형제>의 해설자를 맡았다고 하여 그 아이의 도움으로 4번을 더 볼 수 있었다. 다시 볼 때마다 느꼈던 것이지만, 이 작품은, 아니 이건 뭐,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날 흔들어 놓는 대단한 작품이었다.
첫 서곡이 연주되고 누워있는 두 아이의 주검 앞에서 간난이가 노래한다. “다 거짓말였죠, 네, 그저 꾸며낸 얘기일 뿐” 그러면 바로 해설자에게 빛이 들어오고, 그가 나무라듯 말한다. “들어봤어? 간난 아줌마네 쌍둥이 얘기….” 소극장 안에 어둠과 소리가, 슬픔이 채워지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아이를 책임질 수 없어서 쌍둥이 중 한 아이를 입양 보낼 때, 간난이는 다시 노래한다. “빚을 갚기 전까지 아무것도 내건 없지, 갚아야만 해, 하지만 뭘로? 갚지 못할 땐, 그땐 돌려줘야지, 내 거라곤 없었으니까. 이 빚내서 저 빚 갚고, 끝도 없이 늘어만 가네, 빚더미, 오늘은 또 누가 얼마를 또 갚으라는 걸까” 두 아이가 서로를 모른 체 자라다가 우연히 동네에서 친구가 되고, 서로의 삶의 희망을 안고서 떠나는 1막의 마지막 합창 “눈 부신 햇살, 우린 떠난다 새 삶이 펼쳐질 새 땅으로”까지 학전 블루 극장에만 가면 난 그렇게 행복하고 마음이 충만할 수가 없었다.
한 여자의 삶, 그녀가 단지 살아야 했기에 겪어내야만 했던 수많은 삶의 질곡, 그럼에도 삶을 놓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 삶을 살아가는 모습, 그 모습 뒤로, 그 모습 위로 그녀를 끈질기게 붙잡고 흔들어 버리는 그녀의 시대와 역사 속에서 난 극단 학전과 김민기 선생님의 예술가로서의 힘을 느꼈다. 그가 과거 우리 사회에서 어떤 운동을 했는지는 알지도, 관심도 두지 못한 채 연출가 김민기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학전에서 연출부를 뽑는다고 했을 때 뉴질랜드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다. 순리처럼, 다른 어떤 생각도 욕심도 없이 담대히 학전을 찾아갔다.
면접의 첫 과제로 영어로 말하라고 했던 ‘연출가와 배우의 관계’ 대한 내 콩클리쉬가 끝나자 내 설명 중 프로덕션 패밀리(Production Family)라고 말했던 부분에 대해 김민기 선생님이 물었다. “그럼 식구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네, 연출, 배우, 스태프들까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매표 알바생들,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님들, 그분들이 다 네 식구야.” 김민기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학전에 왜 지원했느냐고. <의형제>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그런 작품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 왔다고 답했다. 선생님은 씩 웃으시더니 옆에다가 “S 총무, 우리가 <의형제> 때문에 얼마나 빚을 졌지?” 물었고 큰 산처럼 우뚝 앉았던 S총무는 “네, 3억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날 더러 다시 물었다. “우리가 3억씩이나 빚진 작품을 이종석씨 때문에 다시 해야겠어요?” 난 꿈쩍 않고 힘주어 질문에 화답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그래도 그 작품 때문에 저를 만나시고 계시잖아요.” 그 자리에 앉았던 4명의 남자들이 모두가 어이없게 웃었다. “돈 주고 봤어, 그냥 봤어?”라고 또 물으시기에, 난 솔직히 돈 주고는 한번밖에 안 봤고, J가 보여준 적이 많다고 말씀드렸다. “J가 문제 구만!” 내 생의 첫 면접은 그렇게 끝났다. 참 여담이지만, J는 의경 신분일 때 병역 의무 중이면서도 대학로에서 술 한 번 샀다. 아무래도 대학 동문보다 고등학교 동문이 더 끈끈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