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와 사투를 벌였다. 지금까지 내가 노트해 놓았던 모든 자료들과 끄적이던 모든 글들을 돌아보며 고전 심청이를 현대의 것으로 변화를 줄 수 있는 어떤 단초를 찾기 위해 술이 다 깨도록 찾고 또 찾았다. 그러다가 얘기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 자료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아이를 지키려 학교에 항거하는 당당한 여고생의 이야기였다. 두 소재들 모두 새로운 작품을 써보기 위해 노트해 놓았던 것인데, 심청이가 이들의 옷을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보기 시작했다.
우선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얘기로 트리트먼트를 만들었다. 대충의 내용은 한국군 장교가 전쟁 중 공산군에게 아내를 잃고, 어린 딸만 데리고 후퇴 중 눈을 멀게 된다. 엄마를 여의면서 까지 자신을 지켜준 아버지에 대해 깊은 사랑과 연민을 느끼는 딸은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나 1.4 후퇴 때 아버지와 헤어진다. 전쟁의 와중에서 딸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전장을 누비고 뭐 그렇게 여차 저차해서 죽을 고비 몇 번 넘기고 아버지를 만난다는 말도 안되지만 또 조금은 말이되는 얘기. 그 밤에 난 취기에 이몽룡 과거 치루듯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고, 날이 밝아서는 당차고 조금 싸가지 없고, 억세게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심청이의 얘기를 정리했다. 이 두 가지의 얘기를 일주일동안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며 고심과 초사를 한 끝에 두 개의 페이퍼를 만들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술단의 기획실과 예술감독실에 메일을 보냈다.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됐다.
오디션 혹은 입학시험, 또는 입사시험을 치러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면접 후 합격자 발표까지의 시간은 지루하고 하루가 멀다. 이거 뭐 결과를 알 수 있나, 붙으면 얼마나 좋을까,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은 타고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무얼 봐도 본 것 같지 않은 뭐 그런 시간이 흘렀다. 연출가는 어떤 작품에 연출로서 오디션을 보거나 아니면 다른 연출가와 경쟁하며 경합을 벌이는 일은 거의 없다. 시험을 보고 기다리는 것은 대학 입시와 학전 응시가 전부였다. 그래서 다시 부름에 대한 기다림은 더 길고 컸다. 내가 호언했던 일주일의 시간동안 하나의 고전 텍스트를 가지고 두 개의 서로 다른(실은 비슷한)트리트먼트를 만들어 예술단에 제출했다. 그 기다림이 애탔던 것은 생활인으로서 2009년 하반기의 작품과 그로부터 받게되는 개런티가 필요했고, ‘심청’이라는 고전을 국립극장에 올려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내가 장담하며 제안했던 두 개의 이야기 구조가 평가를 받게 될지 궁금했다. 채택되면 ‘아, 나 그래도 재능이 영 없지 않구나’하며 스스로에게 용기와 힘을 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나, 얼마나 자괴감에 빠지겠는가. 이건 단순히 일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였다. 9월 이후의 생활인으로서의 생존과 연출가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마음을 졸이며 그렇게, 결과를 기다렸다.
며칠 뒤, 예술단에서 전화가 왔다. 만나잔다. 몰라, 어쩌면 좋아. 나 만나제. 약속을 잡고 한 걸음에 득달같이 달려갔다. 그 한통의 전화에 나는 수일간의 조림과 재능의 유무에 대한 내 안의 논란을 씻어버리고 예술감독실 소파에 당당히, 실은 대단히 겸손히 다리 붙이고 앉았다. “그, 전쟁 얘기는 너무 간 것 같아.” Pw예술감독은 웃으며 운을 땠다. “시간도 부족했을텐데, 그래도 열심히 생각을 정리해 줘서 고마워요. 심청이가 씩씩하고 당찬 아이가 되는 것은 좋은 생각 같아. 같이 한번 해 볼 수 있겠어요?” 해볼 수 있겠냐구요? 당연하지요!! 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래도 연출가잖아, 나는. 그것도 초빙되고 있잖아 지금. 3년전에 조연출로 갔었던 이 곳에 내가, 지금 초빙되고 있잖아. 가오. 그래 살려야지. “고맙습니다.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라는 겸손하고 계산된 답변을 숨을 조절하며 했다. “함께 일할 작가를 찾겠습니다. 저랑 가까이 지내는 두세분의 작가들이 계신데, 그분들과 말씀을 나누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멋있었다. 이번에는 소주도 안마시고, 예술감독님과 악수하고 예술단을 나왔다. 가슴이 벅찼다. 예술의 전당에 관객으로 오지않고, 예술가로 오게 된 순간이다. ‘나 출세했어.. 예술단하고는 정말 한 사십대 중반은 넘어야 작품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에 올리는 작품을 맡았다!!!’ 숨이 가빴고, 소리치고 싶었다. 제일 먼저 아내에게 전화했다. 아내는 너무나 기뻐하며 흥분하지 말고 잘 해내라며 내 숨을 눌렀다. 그래, 이제 부터야. 해보자. 죽기 아니면 살기.
정말 그랬다. 아직 젊은 연출이 그곳에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정말 잘해야 살고, 잘 못하거나 평균 이하면 연출로서는 사망선고를 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예술단의 제안은 기쁘고 영광스러웠지만, 강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지만 해 내야했다. 내가 뱉은 말이 있었다. 급했다. 11월이 공연인데 기존의 것을 깨고 판을 다시 짜려면 대단히 부족한 시간이었다. 대본이 바뀌면 음악도 모조리 바뀌어야 하고, 그러려면 연습까지 남은 서너달 동안 모든 것이 새롭게 준비돼야 했다. 급했다. 내 마음이 급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Lh누님(극작가, 뮤지컬 작가로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훌륭한 작가다. 대학 2년 선배, 누나는 늘 재기가 넘쳤다. 학교 때부터 누나는 한참어린 나를 동등한 친구로, 동료로 대했다. 대학 시절에도, 누나 유학시절에도, 돌아 와서도 말의 다룸에 대해 누나에게 많이 배웠다.)께 전화 했다. 사적인 얘기지만 난 학교 다닐 때부터 누나와 죽이 잘 맞았다. 누나와 나는 늘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 받았는데, 우리의 농담 코드가 독특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그 대화의 즐거움을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누나는 말재주가 뛰어났다. 워낙은 연기 전공이었으나, 3학년 때 부터 글쓰기를 시작하더니 결국 음악극 창작으로 유학을 갔고, 뉴욕 시청에서 멋지게 결혼을 하더니 떠날 때 그랬듯 멋지게 다시 돌아와 눈부시게 작업했다. 음악극 창작 작가로서 제일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또 사적, 공적인 관계에서 충분히 신나게 함께 일할 수 있는 파트너로 나 혼자 오랫 동안 누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회가 온 것이다, 누나와 함께 일할 수 있는.
“누나!” “아이구! 이게 누구야” “저 안보고 싶어요?” “아이구, 보고싶지, 왜 안보고 싶겠어!” “그럴 것 같아서 전화 했어요, 누님 하반기에 바쁘세요?” “그러게, 뭘 하는지도 모르게 나는 바쁘기만 하네?” “으… 서울 예술단이랑 작품하기로 했는데, 심청이로. 함께 하실 수 없어요?!” “아! 우리 종석이가 예술단이랑 작업하는구나! 아이구 잘됐다. 축하해!” “아니 할 수 있냐구요!!” “악! 하고 싶어라! 그런데 누이가 몇 개 일을 벌여 논게 있어요! 아. 나도 그런데랑 작업해야 하는데!” “몰라 몰라 몰라. 누나 나빠요!” “미안, 미안, 미안. 종석인 잘 할거야. 공연 보러갈게. 힘내서 잘 해야 돼!” 누나가 안된단다. 그 무렵 누나는 무척 바쁘게 지냈다. 학교 강의에 뮤지컬 <사춘기>, <내 마음의 풍금>, <미녀는 괴로워> 등등등 누나는 바밨다. 누나 바쁜 걸 왜 모르랴. 그래도 누나와 함께하면 든든한데. 또 머리를 팽팽 굴렸다. 누구랑 해야하나… 누가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가고 있는데, 떠올랐다. 한 사람의 이름이. 강 보 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