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람 작가와 나는 한 번도 작품을 함께해 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그를 알게된 것도 그의 작품을 먼저 보고 알았다거나 누군가의 소개를 받았다거나 뭐 그런 평범한 방법이 아니었다. 2009년 시즌의 뮤지컬 <쓰릴 미>를 연습하고 있던 어느 겨울 밤, 대학로의 순대국집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는데 저쪽 테이블에 Kd배우(정말 재능있는, 학교 때부터 정말 열정이 넘쳤던, 대학 1년 후배이자 동갑. 매번 말을 놓기로하고 20년째 술 마시면 말을 놓고 술 깨면 존대하는 사이.)와 그의 일당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거나하게 취한 Kd가 보람작가를 데리고 우리쪽 테이블로 오더니 지금 자기가 출연하고 있는 뮤지컬 <라디오 스타>를 쓴 작가라며 소개했다.
술자리지만 정중히, 그러나 친밀하게 우린 인사를 나눴다. 서로의 소개 끝에 자신은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를 다닌다고 했다. 전공은는 다르지만 동문이라서 조금 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술도 마셨겠다, 안면없는 남자들이(강보람은 남자다. 지금은 딸 둘의 아빠.) 처음만나 친해질 수 있는 얘기는 공통의 경험담이나 관심사인데, 주로 하는 얘기가 뭐 군대 얘기나, 학교 얘기, 아니면 조금 불건전하지만 남의 뒷 담화를 아주 사알짝 맛사지를 해서 한다던가 뭐 그런건데, 얘기를 나누다가 이친구가 날더러 음악연극 <갈매기>를 연출 했었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가 봤다는 것이다. 이러면 급 친해지지.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돈없이 소극장에서 한 작업이라 얼마 보지도 못한 공연을 이친구가 봤다고 인사하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나는 갑자기 도파민과 엔돌핀을 분비하며 보람이와 뜨거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고 친해졌다. 사람은 역시 관중과 포숙아처럼 서로 칭찬해 줘야 힘이 생기고 용기도 생기고 관계도 돈독해 지는 법인가보다.
어쨌든 이렇게 알게 된 강보람 작가는 그 후 딱 한번을 더, 우연히, 충무아트홀에서 내가 갈비뼈 부러진날 병원가다 만났을 뿐인데(<쓰릴 미> 연습을 충무아트홀에서 했는데, 배우들과 매일 연습실에서 족구를 했다. 네트가 없어 의자를 세워놓고 하다가 공 찬다는게 헛딛어 의자를 덮쳤다. 참 많이 아팠다, 그날. 무수히 챙피했고.) 그의 이름이 내 머리를 스쳤다. 전화를 걸었다. 그게 그 친구와 번호를 주고 받은 후 첫 통화였다. 웬일이냐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여러 말 하지 않고 본론을 말했다. 내가 이만 저만하니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보람이를 꼬셨고, 보람이가 내 꼬임에 넘어와 참여 의사를 밝히는데는 한 5분도 안 걸렸다. 보람이라고 왜 걱정이 없었겠는가, 한 번도 작업해 보지 않은 나와 그것도 몇 달 남지도 않은 장막 공연을, 예술단이라는 시험대 위에서 해야 하는데, 그 짧은 순간 보람이라고 왜 머리를 팽팽 돌리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보람이는 내 손을 잡았다. 됐다. 작가 구했다.
보람이와 만나서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들려줬다. 내가 썼던 2가지의 트리트먼트를 주었고는 그 중 예술단과 뜻을 맞췄던 당당한 버전의 심청이에 대해서 내 생각을 전했다. 보람이는 고맙게도 흥미로워 했고,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지만, 우선 해보자고 뜻과 기운을 모아줬다. 예술단과 다시 만나기 전에 기본적인 틀을 잡아보기로 했다. 지금과 같은 우리 공연 시장에서 뮤지컬로 아무 해석없이 심청이를 그대로 올리는 것은 자살행위다. 나부터도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다 아는 얘기 아닌가. 착한 효녀 심청이가 아버지 눈 뜨게 한다며 인당수에 뛰고, 이 후 구월 사일생으로 살아나 왕비가 되어 맹인 잔치를 열어 아버지를 만난다는 이 내용은, 모두 알 듯 좋은 얘기지만 지루하고 고루한 얘기를 오늘을 사는 우리 관객들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우린 많은 대화와 많은 커피와, 많은 담배를 나누고 허비하며 청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청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또 청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또 우리가 아는 심청이 얘기 외에 다른 버전의 심청이가 있는지도 찾아보고 알아보며 수일간 얘기를 이어 나갔다. 뭐 결론은 쉽지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버전의 심청이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운이 감도는 알 수 없는 어느 나라의 옛날 어느 시기. 국왕인 아버지 속을 썩이며 유랑하는 왕자가 아버지 병세가 위독하여 어쩔 수 없이 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필 가는 길에 배가 고장났다. 이 배를 수리하러 청이가 사는 마을, 도화골에 도착하고, 왕자는 그곳에서 빨래를 하며 아버지를 봉양하는 청이를 만난다. 왕자의 빨랫감을 가져다 주다 두 사람은 사알짝 눈이 맞아 설레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왕자의 배는 출항할 때가 가까워 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배가 궁으로 가려면 반드시 인당수를 지나야 하는데, 그곳의 물살이 하도 센곳이라 산 재물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 그 사이 심청이 아빠 학규오빠는 도박꾼 만석이에게 속아 눈을 뜨겠다는 욕심에 공양미 삼백석 특별 찬스에 싸인을 하게되고, 그 사실을 안 청이는 아빠 살리겠다고 인당수행 산 제수에 지원하게 된다. 그래서 물에 뛰고, 왕자가 물에 뛴 청이를 구하고, 두 사람은 궁에서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궁에는 왕위 찬탈을 노리는 세력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고 청이의 기지와 헌신으로 반란은 진압되고 왕자는 왕이되고 청이는 왕자를 위해 궁을 떠난다는 그런 얘기의 흐름이 일단 정리됐다. 이제 이 흐름이 정리된 페이퍼를 들고 다시 예술단을 찾아가 여러 문제들을 담판 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