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일기 29

Scene 5 도움 닫기 ; 욕망은 이기심을 부르고

by Pia Jong Seok Lee

어느 때 부터인가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을 제외하고는 마음 편히 나를 내어 놀 사람들이 주변에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작품을 함께 할 때는 그 대상이 누구든지 한 식구가 됐다. 짧게는 10주, 길게는 여섯달 이상을 매일 만나고 통화하고 싸우고, 함께 분노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다가 작품이 끝나 새로운 곳으로 서로 떠날 때면 그 하룻밤이 미어지게 가슴 아팠다.그리고는 새로 시작되는 새 작품과 그 안에서 만날 새 식구들과의 새로운 만남을 반겼다. 일의 특성상 일 년이면 몇 번이고 새로운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기에 난 이별에 익숙했다. 이별 후에는 작품을 포함하여 함께 했던 사람들을 마음 한편에 묻었지 그 마음을 계속 붙들거나 만남을 지속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게 편했고 그게 옳았다. 그렇다고 한번 헤어지면 영 남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관계는 지속되지만 함께 작업할 때처럼 매일 전화하고, 자주 만나지 않을 뿐 언제든 다시 만나면, 언제든 전화하면, 언제든 서로가 생각나면 어제처럼 관계가 회복되는, 그런 만남과 인연을 가지고 살아왔다.

누구는 내 이런 태도가 정 없다 말하고, 누구는 내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내게 있어 친함은 매일 연락하고 매일 그리워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깊이는 함께 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늘 같은 것이고, 다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매일 애쓰지 않을 뿐, 모두가 내겐 귀한 사람들이고 소중하고 관계들이다. 다행히 이러한 나의 태도를 잘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고, 반면 이러한 나의 태도를 싸가지 없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가끔 있다.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는 감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는 내가 더 노력해야겠지. 싸가지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렇게 살다 보니, (그것은 아마도 매일의 삶 즉 현실에 충실히 살아오다 보니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내 마음을 편히 내어 놀 사람들이 주변에 과연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이 말은 함께 작업을 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늘 한결 같이 사적인 만남을 갖고, 사적인 대화를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다라는 의미다. 아내와 아들도 지극히 사적인 관계이지만 그들과의 대화도 어느 한계가 있다.


친한 후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만나 수다를 떨자기에 반가운 마음에 약속을 정해 만났고,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시작했다. 간단한 수인사와 서로의 삶, 현재의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이상했다. 난 분명 그 녀석이 좋은데, 그 녀석이 분명 반가운데, 특별히 더 나눌 얘기가 없었다. 불편했다. 또 한번은 나와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우리 뛰어난 연출부 John(지금은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나의 초기 작품들은 모두 John과 연출가 Sophie 와함께 했다. 그들이 나를 세웠다.)과 소주를, 단 둘이 마신적이 있다. John 은나와 매일 함께하고 거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함께했는데, 소주를 마주하고 서로의 얘기를 시작하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단 둘이서는. 연습실에서 배우들과 나누는 많은 얘기들, 극장에서 스태프들과 나누는 수 많은 얘기들은 어렵지 않다. 그 얘기들은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지고 나눠지는 얘기들이기에, 농담이 섞일지라도 얘기의 양적, 질적 집중력이 높다. 공적 관계속에서 공적 주제로의 대화를 나눌 때는 상대가 둘이건 셋이건 내겐 즐겁고 두렵지가 않다. 그런데 사적인 자리에서의 사적 대화는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마주보고 앉아 있기도 불편했다. 뭘까. 내 이런 태도는… 전화통화를 길게 하는 것도 내겐 어려운 일이고, 누군가와 단 둘이 만나는 것도 내겐 참 어려운 일이다. 사람을 대단히 좋아하고,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단히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설령 그 생각이 옳을지라도 누군가와 사적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내게는 어떤 장애가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편할 때는 혼자 있거나 아니면 연습을 하거나. 둘 중 하나.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몇 가지 기억있다. 군 제대 후 3학년 2학기로 복학을 했는데, 극작과 Jj 선배의 집을 무단 점거하게 되었다. 거의 두 학기 동안 나는 형의 집에서 주인보다 더 편하게 학교를 다녔다. 형과 나는 차이점이 많았다. 나는 늘 다음 학기에 어떤 작품을 할까 고민하고 준비하며 방학과 학기 내내 돌아다녔고, 형은 늘 지난 학기의 작품을 수정, 퇴고하며 방학과 새 학기를 살았다. 하루는 함께 밥을 먹는데, 형이 “넌 요즘 무슨 생각을하며 지내니?” 묻기에 난 “다음 학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뮤지컬로 해 볼까 생각 중이야.”라고 답했다. 형은 날 가만히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직 이번 학기도 남았는데, 넌 늘 내일을 생각하는구나.” 그 기억 하나.


또 다른 기억, 2005년, 작곡가 W 선생님(국악을 통해 다양한 도전을 시도했고, 활동 영역도 전방위적인 천재적인 예술가다.)이 이끄는 국립 청소년 국악 관현악단과 함께 <소리 숲>이라는 국악 퍼포먼스를 만들 때였다. 이 단체는 어려서부터 국악을 시작해 대학에 진학한 국악계의 영재들이 모인 단체였다. W 선생님은 이 학생들이 기존 국악계의 질서를 답습하지 않고,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예술가들로 성장해 새로운 국악계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가길 바랬다. 나와 W 선생님은 학생들과 함께 움직임과 스토리가 있는 연주를 만들었고, 연주자들이 음악적 표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악기와 음악을 통해 그들의 영혼이 자유로워 질 수 있도록 자극하고 이끌었다. 난, 졸업 후 첫 연출작업 이었기에 정말 대단히 의욕적으로 작품에 임했다. 총 4개의 팀을 연습하는데, 밤 8시부터 아침 10시까지 전통원 대 연습실에서 한숨 자지않고 시간대에 따라 4개 팀의 연습을 차례로 꼬박 소화해 냈다. 나와 연주자들 모두 서로에게 집중력을 쏟았고, 깊은 신뢰로 서로의 말과 음악을 발전시켰다. 하루는 연습이 끝나고 집에 가는데 W 선생님이 물었다. “너 이렇게 일하면 부인이 싫어하지 않니?” “선생님은 어떠셨어요?” “난, 결혼 초에 선언했어. 난 뭔가에 홀려있다고…” 홀려있다, 무언가에 홀려있다, 그래. 나도 홀려서 사는구나… 그 기억 또 하나.


생각해 보면 나는 늘 무언가에 홀려서 오늘이 아닌 내일을 살아가고 있다. 연습은 늘 공연을 염두하고, 공연은 늘 관객의 반응을 염두하고, 그것이 끝나면 또 새로운 연습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그것만이 아니다. 또 어떤 작품을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가, 어떤 새로운 관객을 만나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떠나고 싶다, 내 안의 수 많은 얘기에 대한 관심들, 몸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 답답함, 정해진 것 없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 살아 남기 위해 선택해야하는 무수한 것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는 내 스스로가 쌓아놓은 문제들, 게으름, 귀찮음, 조바심. 그리고, 내 삶을 관통하는 것 하나, ‘연출가로서 살아갈 것이다. 이 땅과 저 땅 가리지 않고 다 누비며 뛰고 날아다닐 것이다.’ 그 욕망.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매일 매일의 뒤 바뀌는 고민들, 형식, 작품, 그것에 홀림. 아.. 이걸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구나. 사적인 관계로 변환될 때 내 이런 정리되지 못한 삶이 들춰지기를 거부하고 있구나.. 그래서 사적자리와 관계가 난 불편한 것이구나. 아니 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나에게만 관심이 있었구나…


누군가에게 편하게 내 마음 내어 놓고, 고민을 토로하며 답 없는 답을 구하는 삶의 친구, 내겐 없다. 부인과 아들에게도, 내 반복되는 고민과 갈등을 보이며 그들을 지치게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그들은 이미 지쳐있다. 하지만 내 이런 삶의 태도를 애써 치료하지 않겠다. 이것도 나니까. 스스로를 인정하고 내 안의 문제를 온전히 마주하겠다는 것. 불편해도. 그렇게 살아가야 겠다. 아니 살아가고 싶다. 여전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있다. 헤어지는 날에는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공연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그 서러움은 더하다. 서러움, 그거도 내꺼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충분히 서러워하다가 툭툭털고 일어서련다. 사적관계들과 대화들로 내 서러움, 내 불안을 날려버리지 말고, 내안에 오롯이 간직하고, 좋은 때에 다시 풀어내자. 아직 젊고, 아직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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